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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절제의 경제

등록 2017-11-09 19:54수정 2017-11-09 20:49

[강명관의 고금유사]

어둡고 음습하여 흡사 감옥 같았던 연구동(실제 이곳을 감옥으로 설정한 영화를 찍은 적도 있었다)을 헐고 새 연구동을 지어 입주했을 때 기쁨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새 연구실이 정동향이라 오전 내내 햇볕으로 달구어졌던 것이다.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연구실은 한증막이 된다. ‘에너지를 절약하라!’는 정부의 명을 받들어 학교 당국은 에어컨 온도를 25도로 설정해 두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실제 연구실 온도가 30도를 훌쩍 넘어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복사지만한 창문 4개와 출입문을 활짝 열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복도도 한증막이기 때문이다.

전기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냉방 시스템은 거의 모든 건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하지만 나와 같은 이유로 한여름에 에어컨을 마음대로 가동시키지 못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전기에너지를 전제한 건물을 일방적으로 공급하고는 전기요금을 비싸게 설정하거나, 정부에서 전기절약을 강제하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연구동을 지을 때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창을 크게 만들어 활짝 열 수 있도록, 단열이 충분히 이루어지도록 설계했더라면, 한 해의 반을 더위에 시달리는 고통을 적잖게 덜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의 방향을 약간 달리한다면, 사실 에어컨에 소모되는 전기는 원천적으로 에너지의 과잉 소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 뇌리에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에어컨은 당연히, 그냥, 무조건 설치하는 것이 되어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해, 우리의 일상적 삶은, 과도한 에너지의 소비를 전제하여 시스템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도한 에너지의 사용을 전제하는 시스템을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없애자면서 대안으로 친환경발전을 말하지만, 그 역시 에너지 사용의 확대를 전제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소비의 끊임없는 확대와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소비를(한편으로는 생산을) 영원히 확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소비할 것이다. 요컨대 ‘낭비의 문명’은 근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것이다.

빙허각(憑虛閣) 이씨는 <규합총서>에서 누에 치는 것은 예삿일이지만, 그것에는 절제가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뜨거운 물 속에 고치를 넣으면 물 속에서 급히 움직여 서로 구르니, 이것은 대개 누에가 그 속에서 오히려 살고자 하는 뜻이 있어 그 끓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어찌 어진 사람이 차마 할 바이랴. 그러나 또한 그만두지 못할 것이니, 이따금 적게 쳐서 늙은 분의 옷을 지음이 옳다.” 고치에 든 누에의 번데기가 끓는 물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직조를 그만둘 수는 없겠지만, 노인들의 옷을 마련하는 데 그치고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낭비의 경제를 넘어서려면, 이 절제의 정신, 보다 그럴싸하게 말한다면, 이 ‘절제의 경제’를 심각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사족.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주장하는 분들은 모쪼록 서울에 그 괴물을 짓는 데 앞장서시기를 권한다.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곳에 그것을 건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고리 핵발전소 지척에 살고 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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