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평전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
최백순 지음/서해문집·1만9000원
“점심시간을 조금 앞두고 사내는 (서울) 가회동에 있는 하숙집을 나섰다. 짙은 눈썹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는 오늘따라 날카로운 눈빛에 긴장한 빛마저 역력했다. (…) 비슷한 시각, 김찬도 집을 나섰다. 김재봉의 집에서 불과 한옥 서너 채 건너에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김찬의 목적지 역시 아서원이었다. 하지만 김찬은 김재봉과 다른 길을 이용해 목적지로 향했다. 둥근 모양의 얇은 뿔테 안경, 넓은 이마에 오른쪽으로 가지런히 빗은 머리. (…) 훈정동 초가집에서도 사립문을 나서는 사내의 뒤에는 아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빠른 걸음으로 종묘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박헌영이었다.”(<조선공산당 평전>, 256쪽)
1925년 4월 경성. 각기 다른 곳에서 같은 곳을 향해 가는 인물들의 긴장된 발걸음과 거리 풍경이 펼쳐진다. 조금 뒤면 중국과 러시아에서까지 은밀히 모여든 19명의 낮지만 뜨거운 토론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선언하는 회합이다. 아서원은 경성 한복판, 오늘날 서울 명동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던 중국요릿집이다. “대담하고 무모하기까지 한 이 기획은 일제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조선을 대표한 사회주의 정당 임시대표로 참석한 박진순(오른쪽 셋째). 그 옆으로 레닌이 앉아 있다. 서해문집 제공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1995년 서울. 광복 50년을 맞아 정부는 이동휘(1873~1935)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했다. 1918년 5월 극동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당을 주도한 인물이다. 2005년에는 여운형·김재봉·권오설·조동호·김철수·김단야 등 54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1945년 해방 이후 반세기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이름들. 항일 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마지막까지 불꽃을 피웠으나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유로 서훈 대상에서 배제됐던 운동가들이다.
지난 세기, 독립과 이상을 좇던 수많은 좌파 운동가들이 명멸했다. 일제 시기는 말할 것도 없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남쪽에선 친일에서 반공으로 표변한 세력에 철저히 말살당했고, 북쪽에선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숙청되고 사라져갔다. <조선공산당 평전>은 우리 역사에서 봉인돼 잊혔던 이들을 오롯하고 선연한 기록으로 되살려낸 역작이다. 가까이는 상해와 연해주, 멀리는 모스크바(옛 소련)까지 종횡무진하며 청춘과 목숨을 바쳤던 이들이 뒤틀린 역사의 뒤편에 100여년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마술 램프의 거인처럼 책 속에서 부활한다. 김알렉산드라도 그중 한 명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공산주의 정당 및 전위조직 계보. 서해문집 제공
1918년 9월, 갓 출범한 한인사회당의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는 아무르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러시아 백군(볼셰비키에 맞선 반혁명군)에 체포됐다. “백군은 그녀를 즉결처형했다. 그녀는 소원으로 열세 걸음을 뒤로 걸은 뒤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열세 걸음은 조선의 13도를 상징했다. 러시아 첫 한인 볼셰비키의 불꽃같은 짧은 삶은 그 여름에 끝을 맺었다.”(86쪽)
3·1운동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1919년 가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같은 시기, 시베리아 바이칼호 연안의 이르쿠츠크에선 볼셰비키 한인들이 전로한인공산당을 꾸렸다. 이듬해엔 경성에서 사회혁명당을 필두로 고려공산당(1921년), 고려공산동맹(1923년), 화요회와 조선노동당(1924년), 일월회와 조선공산당(1925년), 레닌주의 동맹(1926년), 경성트로이카(1933년), 경성콤그룹(1939년)에 이르기까지 20년 새 최소 28개의 좌파정당과 전위조직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러시아 볼셰비키의 하바롭스크 시당 비서를 맡았던 한인 2세 김알렉산드라. 서해문집 제공
지은이는 진지한 역사서와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들의 치열했던 삶을 재구성한다. 수많은 논문과 사료, 신문·잡지들까지 뒤져가며 진보 정당의 뿌리를 더듬고, 저술 기간만 5년을 들여 친근한 서사로 엮어냈다. 술술 읽히는 맛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비장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펼쳐지는 문학적 상상력은 한 세기 전 인물들과 시공간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럼에도 치밀한 문헌 조사, 발로 뛴 현장 취재가 뒷받침된 글쓰기는 ‘평전’이라는 장르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엄혹한 시대사 서술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지은이는 새 자료를 접할 때마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행적을 좇아 현장을 누볐다. 현재 경복궁역 7번 출구가 한성 임시정부(1919년)의 첫 회합 터였고, 종로 낙원동 돼지머리고깃집들이 화요회(1924년) 회관 자리란 사실도 그렇게 확인됐다.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 책의 부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을 온전히 수습하는 건 불가능하고 역사의 전면으로 복원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이들의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역사의 작은 한 줄에라도 남겨두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