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에세이 문고-아무튼’을 출간한 1인 출판사 대표들이 29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각자 출판한 책을 들고 있다. 왼쪽부터 김태형 제철소출판사 대표, 이재현·조소정 위고 대표, 이정규 코난북스 대표.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1인 출판은 좌뇌가 기안하고, 우뇌가 결재한다’는 말이 있어요. 혼자 일하는 게 외롭잖아요. 그래서 같이 일한다는 거에 끌린 것 같아요.”
지난 2월의 어느 날, 자유로를 달려 경기 파주의 인쇄소로 가던 이정규 코난북스 대표가 이재현 위고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잠깐 볼까?” ‘파주 옆 단지’라고 불리는 파주출판도시 인근에서 살면서 일하는 이재현·조소정 위고 대표가 이 대표를 맞았다. 이 대표는 가까이 사는 김태형 제철소출판사 대표도 불렀다. 김 대표는 전부터 주기로 했다는 굴비 4마리를 들고 이들을 찾아왔다.
이정규 대표의 제안은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한 가지’를 주제로 세 출판사가 같이 에세이 시리즈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저는 그동안 대부분 사회과학책을 내왔어요. 여러 저자가 짧게 쓰는 에세이를 여러 권 내서 시리즈를 만들고 싶었는데, 제가 3년간 낸 책이 10권인 거예요. 이 속도로는 안 되겠다, 같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이재현 대표가 말했다. “술자리에서 뭐 해보자며 으쌰! 으쌰! 하고는 다음날 되면 다 잊어버리잖아요. ‘술기획’, ‘입기획’이라고 하는데, 이 기획은 다음날 일어났는데도 정말 좋은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기로 했죠.” 제철소 김 대표가 덧붙였다. “다들 창업한 지 3~5년 정도밖에 안 돼서 아직 ‘사장물’이 덜 든 거죠.” ‘아무튼’ 시리즈는 이렇게 아무튼 시작했다.
세 사람은 예전에 푸른숲출판사에서 같이 일한 인연이 있다. 이재현 대표는 단행본 부서에서 팀장으로 일하며 2년가량 팀원인 이정규 대표와 일을 했다. 김태형 대표는 옆 부서인 아동청소년책팀에서 일했다. 이재현 대표의 아내인 조소정 대표는 다른 출판사에서 아동용책 편집자를 했었다. 같이 일해봤거나 친분이 있던 사이라 마케팅이나 디자인 등 일을 분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시리즈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네 사람이 같이 술을 마신 것은 딱 두 번이었는데, 그 두 번의 술자리 모두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한다. “다들 소심해서 회의 때는 마음에 안 드는 주제라도 통과시켜놓고, 나중에 술자리에서 불만을 드러낸 거죠.(웃음)”(이재현 대표)
시리즈엔 각 출판사의 개성이 드러난다. 희곡작가이기도 한 김태형 대표는 ‘잘 쓴 산문’을 받고 싶어 시·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원고 청탁을 많이 했다. 김현 시인이 ‘스웨터’를 주제로 한 에세이를 쓰기로 했고, 임경섭 시인은 ‘피아노’를 주제로 쓰려고 다시 피아노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튼 시리즈’ 1차분으로 제철소가 낸 책은 목수 김윤관의 <아무튼, 서재>,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작가 김민섭이 쓴 <아무튼, 망원동>이다. 김 대표는 “국내 문학 시장이 큰 몇몇 출판사 중심으로 흘러가서 (작은 출판사에서) 시인, 소설가들을 저자로 데려오기가 쉽지 않아요. 자기 책을 내는 출판사가 정해져 있어서, 저희가 원고를 달라고 부탁하는 것 자체가 죄송한 일이에요”라면서도 “하지만 자신이 애호하는 것을 대상으로 짧은 에세이책을 내는 것은 가능하니까, 이 시리즈가 젊은 작가의 글을 끌어올 수 있는 교두보가 돼주는 거죠”라고 말했다.
정신분석책을 많이 내던 위고는 직업이 아닌 ‘나만의 세계’를 만든 사람들의 글을 받았다. 1차분으로 나온 <아무튼, 쇼핑>은 조성민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무튼, 게스트하우스>는 장성민 약사가 썼다. 위고의 대표저자인 라캉 정신분석학 전문가 백상현 박사는 ‘서핑’을 주제로 한 에세이책을 낼 예정이다. 코난북스는 ‘여성의 활동’에 집중한다. 1차분으로 나온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가 과체중으로 몸이 아파 운동을 시작하고 변화되기 시작한 이야기를 담아 <아무튼, 피트니스>를 썼다.
책들은 목표했던 대로 지난달 20~24일 홍대 앞에서 열린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계획했던 대로 홍대 앞이나 망원동, 상수동 골목에 있는 작은 독립서점에 놓여 있을 법한 느낌의 책이 나왔다. 출판사들이 행사 부스에 가지고 나온 책 중엔 가장 잘 팔렸다. 책을 납품해달라는 작은 서점도 있었고, 다른 1인 출판사에서도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었다. 이정규 대표는 “저희도 아직 합의가 잘 안 되는데 열어놓기는 어렵겠더라고요. 대신 다른 출판사끼리 모여서 이런 시리즈를 기획해서 내주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책 앞표지엔 001, 002 순으로 세 자리 번호를 붙였다. 세 자릿수 번호까지 출판하겠다는 다짐이다. ‘소주’(권용득 만화가), ‘택시’(금정연 서평가), ‘편의점’(임현 소설가) 등 20종의 책 출간 계획을 공개한 상태다. 매 분기 3~4권씩 묶어서 내기로 했다.
조소정 대표는 “자기 맘에 드는 책을 내고 싶어서 1인 출판사를 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서로 다르죠. 누군가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는 싫어하고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서 마모되는 과정이 힘들었죠. 그러면서도 놀란 것은 결국은 서로 계속 배려해서, 점잖게 그 과정을 넘어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도 그럭저럭해낼 수 있겠다고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곤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앞으로 술 마시지 말고 밥만 먹을까?”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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