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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위기에 처한 남성’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여성은 ‘몸덩이’가 된다

등록 2017-09-07 20:10수정 2017-09-07 20:30

연세대 젠더연구소의 남성성 연구
친구도 형제로 위계화하는 영화
남성만 역사의 주인공 만드는 문학

그런 남자는 없다-혐오사회에서 한국 남성성 질문하기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엮음/오월의봄·1만9000원

영화와 문학 같은 매체는 자주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에 선다. 최근 강간 살인의 피해자로만 여성을 등장시켜 논란을 빚은 박훈정 감독의 영화 <브이아이피>, 여아의 성기를 묘사한 대목으로 문제가 된 김훈의 소설 <공터에서> 등이 그런 예다.

<그런 남자는 없다>는 2015년부터 2016년까지 1년 반 동안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에서 ‘남성성’을 주제로 연 컬로퀴엄(집담회)에서 발표한 글을 최근의 상황을 반영해 묶은 책이다. 이 책은 식민지 시기부터, 해방 전후, 군사독재 시기를 거쳐 아이엠에프(IMF) 사태 이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변화해온 남성성을 포착한다. 저자들은 주로 설화, 문학, 영화, 예능 등 다양한 문화 매체에서 남성성을 추출하는데, 이 중에서도 최근 논란이 되는 영화와 문학이 남성성을 재현하는 방식을 분석해낸 글들이 흥미롭다.

백문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브로맨스 vs ‘형제’ 로맨스’란 글에서 ‘브로맨스’ 영화들의 논리를 추적한다.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2)에서 나오는 정청(황정민 분)과 이자성(이정재 분)의 관계 등 영화에서 나타나는 브로맨스 관계는 “동성애에 대한 대중적 수용성이 커진 상황에서 남성들 간의 친밀성을, 이성애라는 안전판을 내세워 실험하는 포스트 밀레니엄의 형상”이며 “우정과 의리 같은 남성적 정서들은 동성애적 로맨스를 억압하면서 대체한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에선 위계질서를 지키지 않는 한동수(장동건 분)는 처벌받고, 권수경 감독의 <형>(2016)에선 동생 두영(도경수 분)이 위계질서에 충실해 사랑받고 재활에 성공하는 모습을 대조시킨다. 백 교수는 “남성들 사이에 ‘친구=형제’의 위계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친밀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 무능함, 기존과는 다른 관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빈곤감은 동어반복을 맴돌다가 한때 소비되고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백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지난 5월에 개봉한 <불한당>(설경구, 임시완 주연)은 위계질서적인 형제 관계로 환원되지 않고 남성 간의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춰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본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 개봉한 박훈정 감독의 영화 <브이아이피>(VIP)는 여성 등장인물 대부분이 이미 살해됐거나 살해될 예정이며, 지나치게 강간 살인 장면을 길게 표현해 ‘여성혐오’ 영화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지난 8월 개봉한 박훈정 감독의 영화 <브이아이피>(VIP)는 여성 등장인물 대부분이 이미 살해됐거나 살해될 예정이며, 지나치게 강간 살인 장면을 길게 표현해 ‘여성혐오’ 영화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폐소공포증 시대의 남성성’이란 글에서 김한민 감독의 <명량>(2014)에 나오는 이순신(최민식 분)이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이 아닌 늙고 지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데 주목한다. 그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풍파를 견뎌온 아버지만이 마지막으로 이 파국의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상상을 펼쳐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영화 <브이아이피>에 대해 “영화 <청년경찰>도 그렇고 현실에서 남한 여성을 때리고 죽이는 이들은 남한 남성인데, 이 영화들에선 조선족이나 북한 등 외부의 남성들이 내려와 남한 여성을 납치하고 죽이고, 남한 남성들이 남한 여성들을 구한다는 상상력을 펼친다. ‘위기에 처한 남한 남성’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해서 조선족과 북한 남자는 악마화되고 남한 여성들은 시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연구자 오혜진은 한국 문학에서 중견 남성 소설가들이 내놓은 ‘장편 남성서사’를 문제 삼는다.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 천명관 작가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김훈 작가의 <공터에서>가 한국 근현대사를 남성 집단의 자기서사로 구성해내는 일을 긴요한 문학적 과제로 삼는다는 점을 짚는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영화 <국제시장>(2014)처럼 우경화된 역사서사의 인물이 아니며, 안정적인 가부장이 되어 본 적이 없는 ‘흔들리는 남성’으로 주류 남성 서사와는 구분된다는 점은 맞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들 작품에서 남성은 비록 ‘추문’이지만 아버지부터 아들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쌓아가는 역사의 주체이며, 여성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얻지 못하며 역사로부터 배제된 자로 그려진다. 그는 “이 서사들은 민주화 이후 성립한 ‘진보적 상식’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것을 심문에 부치지만, 단 한 번도 ‘가부장적 남성연대’의 노래이기를 거부한 적은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민주화 이전의 세계에 머물며 그 세계의 안녕과 지속에 공모한다”고 말한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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