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이야기다.
유조인(柳祖?, 1522~1599)은 몸가짐이 단정한 선비였다. 어느 날 정승 노수신(盧守愼)을 따라 한강을 유람하면서 물고기를 구경했다. 사람들이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 동이에 가득 채우자, 그것을 본 유조인이 동이 채 강물에 도로 던져버린다. 회나 매운탕을 기대하며 침을 잔뜩 삼켰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건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살아 있는 벌레를 밟았다. 유조인은 말에서 내려 말구종에게 즉시 벌로 물을 한 사발 마시게 하였다. 실수로 벌레를 죽이는 것조차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유조인이었으니 채식주의자였던 것은 물론이다. 순천부사로 재직할 때 어떤 이가 그에게 대합을 바쳤다. 살생하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는 유조인이 조개라고 해서 어떻게 먹을 수가 있겠는가. 강물에다 놓아주었다. 바다에서 나는 대합을 강에다 놓아준 것이 놀림거리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유조인은 뒤에 익위사 사어(司禦) 벼슬을 하였다. 사어는 세자를 모시는 무반직으로 꽤나 좋은, 청직으로 치는 벼슬이다. 하루는 큰 냇물을 건너는데 세자시강원의 문학(벼슬이름, 정5품) 남이공(南以恭)이 물고기를 보고 한 마디 하였다.
“헤엄치며 노는 물고기가 볼 만하구나. 그물을 던지면 정말 좋겠구나!”
불살생(不殺生)의 유조인이 그냥 있지 않았다.
“헤엄치며 노는 물고기가 볼 만한다는 것은 좋은 말이지만, 그물을 던지면 정말 좋겠다는 그 말은 어찌 그리도 험악한가? 헤엄치는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면 물가에서 구경하는 사람이야 좋다며 펄펄 뛰겠지만, 물속에는 삼족(三族)이 몰사하는 비극이 있지 않겠소?”
그물로 물고기를 잡으면 보는 사람이야 좋아 펄펄 뛰겠지만, 그건 사람의 입장이고, 물고기의 입장에서는 일족이 한꺼번에 죽는 비극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유몽인은 유조인의 말이 불교에 가까운 것이지만 또한 그 마음은 군자에 가까운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어 그는 송대의 문인 황산곡(黃山谷)의 시구와 소동파(蘇東坡)의 편지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가죽옷 비록 따뜻하기는 하나, 여우와 담비가 참으로 불쌍하네.”(황산곡) “소를 잡고 양을 잡고, 물고기와 자라의 살을 발라내니, 먹는 사람은 맛이 있겠지만 죽는 것들은 몹시도 괴로우리.”(소동파)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죽음을 당하는 짐승의 입장에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살충제 달걀 소동이 있었다. 닭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키우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닭을 넓은데다 키우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닐 것이다. 인간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다만 지금의 산업화된 축산업과 육식문화는 아무리 보아도 과도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기를 조금이나마 덜 먹고, 짐승도 제발 제 성품대로 살게 키우자. 티브이의 먹방도 좀 줄이고! 살충제 달걀 소동에 물고기와 벌레의 생명조차 존중하던 채식주의자 유조인이 생각나서 부질없지만 이렇게 써본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