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시하다
김혜순 지음/문학과지성사·1만5000원
“남성과 여성 사이, 우파와 좌파 사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 무수한 사이의 자리에 시의 자리가 있다.”
한국 여성시를 대표하는 김혜순 시인이 시론집 <여성, 시하다>를 냈다. 2002년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이후 15년 만이다. 시인은 1979년에 등단해 12권의 시집을 냈고, 이 중 여러 시집이 영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돼 국외에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 5월 열린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미국 계관시인 로버트 하스(76)는 “김혜순의 시를 읽고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여성이 시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시인은 “여성시가 남성적 포지션에서 쓰는 시들하고 가장 다른 점은 여성에겐 수치라는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경중을 달리할 뿐이지 성적인 피해자로 갖는 수치가 모든 여성에게 있다. 이처럼 여성은 다 까발릴 수 없는, 자기 고백을 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여성시는 서사적이지도, 리얼하지도 못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성 시인을 유령이라고 부른다. “부재한 자리, 사라진 자리가 바로 여성의 자리다. 폭력이 가해지고, 살해당한 여성이 부재하는 모든 자리에 여성시의 자리가 있다. 시인은 한번 죽어본 사람으로 말한다. 유령처럼 죽었지만 계속 나타나서 말을 하는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23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난 김혜순 시인은 “인터뷰를 하면서 속으로 ‘분명하고 확실히 말해야지’라면서도 ‘이건 시적인 이야기가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세월호를 겪은 경험은 여성시를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다. “2014년엔 어른이라서 너무 부끄러웠다. 학생들 앞에서 고개를 못 들었다. 그 뒤로 어떤 단어들이 묵음 처리됐다. 그 배 이름을 쓰지 못한다. 바다라는 단어도 쓸 수가 없다”고 시인은 고백했다. 그는 “여성에게도 그런 경험의 일단이 있다. 부재의 장소에 처하는 경험, 시스템 밖으로 내쫓기는 경험, 성적 수치를 당한 경험. 성소수자나 난민, 다름을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경험이 바로 시인의 자리다. 남성적이거나 가부장적인 자리는 시의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적인 것이 곧 시적인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여성시는 생물학적인 여성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이나 김수영 같은 시인들을 좋아한다. 물론 어느 한 지점에서 싫을 때가 있다. 너무 이분법적으로 세계를 나눠서 볼 때가 그렇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시의 새 자리를 만든 사람들이다.” 시인은 “김수영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굉장히 여성적인 자리에 있었다. 시 쓰는 자리를 궁상맞고 일상적인 자리로 가져오고, 일상어를 말함으로써 시스템의 언어에 항의했다. 기침과 가래 같은 이비인후에서 나오는 더러운 분비물이 언어라고 하는, 자기의 언어를 개발해 시를 썼다”고 평가했다.
여성시가 난해할 때가 많은 것도 이런 점에서 유래한다. “내 시를 읽고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라고 하는 반응이 가장 많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수치 때문이다. 세상의 언어도 여성에게 수치를 강요한다. 수치 때문에 모국어에 얹어진 남성적인 표현을 쓰지 않으려 한다.” 그는 “사람들이 미술이나 음악은 ‘알아야 보이고 들린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시는 언어이기 때문에 탁 보면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하지만 여성시가 남성과 다른 언술을 만들기 위해 많은 갈고닦음, 형식의 계발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조금의 노력을 거쳐 이 안에 들어오면 굉장히 풍요로운 대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난 5월 시집 <피어라 돼지>로 5·18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수상을 사양했다. 그가 수상자로 선정되자 그에 대해 “언어주의자” “시에 현실이 없다” “모더니즘의 활개가 무섭다”라는 비난이 일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새로운 말하기 방법에 대한 탐구가 없다면 나는 그걸 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모더니즘이라면 모던에 대해 굉장히 잘못 이해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시론은 모두 수상 이전에 쓰인 것이지만, 이런 비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향해왔기에 책에는 좀 더 상세한 답변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지식 체계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을 가져와 나의 시에 들이대는 것이다. (일단 못 알아먹겠으면 초현실이라고 한다.) (…) 시의 나라 안팎의 제국주의. 내 시 밖의 크레바스들. 지옥들. (…) 내 검은 눈동자가 흰 피 흘리며 으깨지네. (…) 이제까지 나의 시에 대한 충고 중에 가장 많은 결말, 화해를 모색하라는 명령과 사회의 바다에 나오라는 명령. 모르겠는가. 이 두 명령은 모두 나에게 시를 그만 쓰라고 명령하는 거다. 그만하라는 거다. 시를 산문성에 종속시키라는 명령이다. 발라드나 인생을 위한 찬가로 업종을 변경하라는 것이다. (…) 현실이 없는 시는 없다. 그것의 치환, 병치, 은유, 환유, 회피, 현미경적 접근, 망원경적 접근, 현실의 표면에서 살짝 포를 뜨기, 뼈째 우려내기 등등이 있을 뿐이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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