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서울 여의나루에서 출항한 한강유람선 아라호 테라스에서 ‘보도용 사진을 찍게 포즈를 좀 취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장강명(맨 오른쪽) 작가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에 손을 뻗어 스마트폰으로 조명을 비추는 이는 최내현 북스피어 공동대표.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밤 10시가 가까운 지난 4일 금요일 밤, 서울 여의도 한강변은 여름밤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치킨 냄새 자욱한 여의나루역을 지나, 주로 20~30대인 150명의 사람들이 강변에 정박한 한강유람선 아라호로 향했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를 삶의 신조로 출판계의 엄숙주의와 맹렬히 싸워온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어떤 책인지 모르게 표지를 싸서 파는 ‘개봉열독 엑스(X)’, 독자와 함께 여행하며 추리소설의 교정을 보는 ‘낭만열차’ 등을 성공시키며 이벤트 기획자인지 출판사 사장인지 헷갈리는 경지에 이른 그다. 아라호는 올해 네 번째를 맞은 그의 또 다른 필살기, ‘장르문학 부흥회’가 열린 곳이다.
‘1박2일 동안 추리소설, 공상과학(SF) 등 장르문학 관련 작가나 전문가의 강연을 듣는다’는 얼핏 새로울 것 없는 형식에도 일찌감치 4만원짜리 티켓을 ‘완판’시킨 비결은 바로 이 장소다. 한여름 밤에 한강유람선. 왜 다른 출판사들은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하지만 그의 연이은 성공을 누군가 시샘했을까. 배가 바로 뜨지 못했다. 출항시각이 1시간 넘게 지나자 김 대표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사전에 서울시와 유람선 운행사 간에 협의가 잘 되지 않아, 선장이 퇴근해 버렸다네요. 다시는 유람선에서...(하면 안 되겠네요).”
5일 서울 여의나루 한강유람선 아라호에서 열린 제4회 장르문학 부흥회에서 가수 요조(오른쪽)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왼쪽)와 대담을 나누고 있다. 원병묵 성균관대 교수 제공
예정됐던 선상 추리게임은 취소하고, 첫 번째 강연자인 박상준 서울에스에프(SF)아카이브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시작이 원활하지 않은 게 장르문학스럽지 않나요. 하하하.” 호탕한 웃음에 참가자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에스에프의 핵심 정서는 경이감이라고 합니다. 그 경이감은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에스에프 작품의 미덕은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시야가 넓어지게 해주는 거죠.”
첫 강연이 끝나고 자정이 되자, 되돌아온 선장이 배를 띄웠다. 3층 테라스로 올라가자 은은한 조명과 달빛이 여의도 일대의 야경과 어우러져 숨막힐 듯 아름다웠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마포대교와 서강대교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김탁환·장강명 작가가 불이 번쩍이는 나이트클럽 웨이터 복장을 하고 직접 음료를 날랐다. 장강명 작가는 “이런 거 시킨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한 시간 전에 옷을 주더라고요”라고 김 대표를 흘겨봤지만, 누구보다 신나서 참가자들과 인증샷을 찍은 건 그였다.
40분간의 짧은 유람에 남은 아쉬움은 가수이자 책방 ‘무사’의 주인인 요조가 달래줬다. 고백하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 ‘그런 사람’과 ‘불륜’을 부르자, 사람들은 이루어졌거나 이뤄져선 안 되는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노래에 빠져들었다.
김탁환 작가는 숨겨뒀던 실패담을 털어놓았다. 김 작가는 8권에 이르는 ‘조선 명탐정’ 시리즈를 쓰면서 주인공에 관해 외워야 할 사실이 점점 늘어나 급기야는 사실관계가 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점점 미워져서 죽이고 싶어지는 거죠. 코난 도일이 왜 셜록 홈스를 죽였는지 이해가 돼요.”
‘졸음 취약 시간대’인 새벽 3시가 넘어가자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사람들이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김홍민 대표가 무대에 올라가 사람들을 일으켜세우고 퀴즈대회를 열었다. ‘우승자 3명에게 매대에 있는 책을 원하는 만큼 준다’는 이야기에 장르문학 ‘덕후’들의 눈이 번쩍 띄었다. “아서 클라크의 대표작 <라마와의 랑데부> 한국어판 번역자 이름은?” 같은 고난도 질문에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나가떨어지는 와중에도 마지막 3명이 남아, 자신이 구제가 불가능한 오타쿠임을 과시했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가장 늦은 시간대의 강연을 맡았다는 장강명 작가는 ‘시에스아이(CSI) 과학수사대’ 모자에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올라왔다. 그가 오늘 수사할 대상은 그가 가르친 제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장르문학 구분법’. “제가 출강하는 수업을 듣던 한 웹소설 작가 학생이 자신은 ‘문학이 아닌 매문을 한다’고 자조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면서 새 구분법을 구상했다고 한다.
5일 새벽 3시 서울 여의나루 한강유람선 아라호에서 열린 제4회 장르문학 부흥회에서 장강명 작가가 ‘사고실험으로서의 장르문학 구분법’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원병묵 성균관대 교수 제공
“소설의 3요소를 인물·사건·배경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문체를 추가한 4가지 요소를 가지고 사고실험을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거죠.” 소아성애가 있는 양아버지라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인물실험소설’, 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간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은 ‘문체실험소설’, 추리나 액션, 로맨스가 펼쳐지는 작품은 ‘사건실험소설’, 과학기술이 발전한 미래나 마법이 실재하는 중세 같은 에스에프와 판타지처럼 ‘배경실험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의 구분도 달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각 실험소설 중에서 실험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걸작들이 바로 고급문학이고, 그 실험을 적절히 진부하게 해서 많은 사람이 읽도록 하는 것이 대중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5시가 거의 다 된 시각, 부흥회의 막을 내리며 김홍민 대표가 말했다. “내년에는 무인도에서 해보는 건 어떨까요?”
5일 서울 여의나루에서 출항한 한강유람선 아라호 테라스에서 참가자들이 장강명 작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와 인증샷을 찍고 있다. 원병묵 성균관대 교수 제공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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