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황구첨정(黃口簽丁)이니 백골징포(白骨徵布)니 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국사 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혹 잊었을까 봐 다시 설명을 붙여본다. ‘황구’는 새 새끼의 노란 부리로서 어린아이의 입, 곧 어린아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황구첨정은 어린아이를 ‘장정의 명부에 올린다’(簽丁)는 것, 곧 군역을 질 장정의 명단에 올린다는 뜻이다. 백골징포는 간단하다. 죽어 백골이 된 사람에게도 군포(軍布)를 거둔다는 뜻이다. 군포는 1인당 1년에 면포 2필이었다. 한 집안에 남자가 다섯이라면 10필이었다. 무거운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군포를 내는 나이는 16살에서 60살까지다. 그러니까 황구첨정과 백골징포는 16살은커녕 그보다 훨씬 어린 갓난아기도, 죽어 백골이 된 사람도 군포를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갓난아기와 죽은 사람이 어떻게 군포를 낼까? 어른과 산 사람이 낸다. 시달리다가 달아나거나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럼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이 있다. 이웃과 친족들에게 받아내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 등 직업군인으로 채워진 군영이 생기자, 원래 군인으로 나가던 양민들은 대신 군포를 내게 되었다. 양반도 양민이니 군포를 내어야 마땅하지만 잘난 지배층이란 이유로 내지 않았다. 군포는 오직 양민의 몫이었다. 황구첨정·백골징포, 인징·족징도 당연히 백성들을 쥐어짜는 수법이었다.
양민은 군포만 내는 것이 아니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 절반을 지주에게 바쳤다. 거기에 또 온갖 잡세가 달라붙었다. 어떻게 견뎌 내겠는가? 양민들은 시달리다 달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였다. 사회가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렸다. 군포를 감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그 결과 영조 27년(1751)에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여주는 것을 골자로 한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균역법은 성공하지 못했다. 2필을 1필로 줄였을 때 생긴 재정의 결손은 어떤 형태로든 결국 양민이 부담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양반도 군포를 내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당연히 양반도 군포를 내어야 하고 또 양반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구전(口錢, 인두세)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 위로 공경대신(公卿大臣), 종실(宗室), 부마(駙馬)부터 호(戶)를 단위로 호포(戶布)를 내고 사람을 단위로 구전을 내어야만, 그 아래 백성들도 거부감 없이 세금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부담이 덜어져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양반들이 자신들은 무식한 상것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다며 맹렬히 반대해 호포도 구전도 실현되지 않았다.
세금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박지원의 세금론이다. 오늘날 공평한 세금이란 어떤 것인가. 소득이 많은 사람은 많이, 적은 사람은 적게 내는 것이다. 이 원칙에 의거해 대다수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과세의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이다. 국민건강 운운하면서 담뱃값 올렸다 내렸다 사기 치지 말고 말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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