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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겸손한 자들의 통치, 민주주의

등록 2017-07-20 19:46수정 2017-07-20 20:06

오스트레일리아 정치학자 존 킨
전지구적 민주주의사 다룬 대작
“현대는 ‘파수꾼 민주주의’ 시대”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
존 킨 지음, 양현수 옮김/교양인·3만9000원

‘민주주의는 그리스에서 탄생해 유럽과 미국을 거쳐 세계로 전파된 서양의 발명품’이란 통념은 과연 사실일까?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시드니대학과 베를린사회과학원(WZB) 정치학 교수인 존 킨은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민주주의는 서양의 발명품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그가 물경 1152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을 써낸 까닭은 이런 주장을 ‘정설’로 자리매김하려는 야심찬 기획으로 읽힌다. 유럽과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대륙에서 진행된 민주주의의 역사를 쉽고 명쾌하게 꿰뚫은 이 책은 ‘민주주의의 빅 히스토리’라고 부를 만하다.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 지은이 존 킨. 교양인 제공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 지은이 존 킨. 교양인 제공
존 킨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나눈다. ‘회의체 민주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 ‘파수꾼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지은이는 먼저, 근대 이전의 ‘회의체 민주주의’를 검토하면서 ‘민주주의가 기원전 550년경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의 발명품’이라는 학설에 포문을 연다. 현대 고고학은 그리스보다 2천년 전인 당시 ‘동방’(지금의 시리아, 이라크, 이란 지역)에서 평등한 사람들의 ‘자치 회의체’가 시작돼 인도를 거쳐 그리스로 전달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스에서도 도시국가 암브라키아는 아테네보다 70년 정도 빠른 기원전 580년 민회에 의한 자치가 이뤄지는 정부를 세웠다.

이어 지은이는 ‘아테네 이후에 민주주의가 1천년 동안 소멸했다가 이탈리아 북부에서 다시 부활했다'는 통념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론 이슬람이 고대 회의체 민주주의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교량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슬람 지역의 ‘와크프’는 통치자와 부유한 귀족에게서 기금과 토지를 기부받아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보장해주는 비정부 제도였다. ‘모스크’는 예배당이면서 만남의 장이자 민회와 같은 정치적 기능도 있었다.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로 접어드는 신호탄이 된 의회의 탄생을 해석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소 9세는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려고 1188년 귀족과 주교와 도시 시민의 대리자를 모은 ‘코르테스’ 즉, 최초의 의회를 소집한다. 존 킨은 당시 알폰소 9세가 이슬람 상업 관행상 법적 대리인을 세우는 방식에서 의회 탄생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라 본다. 이 때문에 지은이는 의회를 “이슬람과 기독교가 부모가 되어 낳은 새로운 제도”라고 봤다.

“이상적으로 생각할 때 민주적 제도에는 ‘지배’라는 활동이 없어도 된다. 여기서 ‘지배’란 대항 수단이 거의 없거나 혹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위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민주적 상황에서는 누구도 타인을 지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통치하는 자가 항상 공적인 견제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퍼트 소인족 1천명이 감시의 밧줄로 통치하는 자를 묶은 것과 같다.” 교양인 제공
“이상적으로 생각할 때 민주적 제도에는 ‘지배’라는 활동이 없어도 된다. 여기서 ‘지배’란 대항 수단이 거의 없거나 혹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위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민주적 상황에서는 누구도 타인을 지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통치하는 자가 항상 공적인 견제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퍼트 소인족 1천명이 감시의 밧줄로 통치하는 자를 묶은 것과 같다.” 교양인 제공
의회의 탄생에 이어 영국, 스웨덴, 미국에서 연이어 일어난 혁명을 거치면서 민중의 선거로 권위를 부여받은 대리인들에 의해 작동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완성됐다. 선거제도, 성문헌법, 독립적 사법부, 언론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가 생겨난 것이 이 단계다. 20세기에 들어 1941년 기준으로 지구상에선 민주주의 국가가 41곳에 불과할 정도로 위기를 맞았으나, 이후 민주주의는 화려하게 부활해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정치체제가 됐다.

지은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민주주의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고 보면서 이를 ‘파수꾼 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 그는 의회 바깥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조직이 100가지 이상 새로 탄생했다는 점에 눈길을 준다. 그 예로 국제 인권 기구, 공익소송, 시민 의회, 싱크탱크, 블로그 등이 끝없이 이어진다. 정부와 의회, 정당 등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기구들만 민중의 통제에 두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손이 닿지 않았던 시장과 국제사회, 환경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권력을 감시하고 분산시키려는 움직임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파수꾼 민주주의’다. 독일에서 기업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기업 내부 노동자 대표가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공동 결정 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파수꾼 민주주의의 중요한 사례다.

1865년 베르나르도 페란디스 바데네스가 그린 에스파냐의 수자원 재판.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에서 존 킨은 “가뭄이 잦은 무르시아와 카탈루냐 지역의 강 유역에 만들어진 관개 농경지에서 농민들은 농작물 관개 시설을 개발했는데, 이 시설들을 유지하는 조직―이를테면 이 조직은 수자원 재판소라고 할 수 있다―은 법률 적용을 관장하는 권한이 있었으며 농민들 스스로 이 조직의 활동을 계속 감시했다”고 설명했다. 교양인 제공
1865년 베르나르도 페란디스 바데네스가 그린 에스파냐의 수자원 재판.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에서 존 킨은 “가뭄이 잦은 무르시아와 카탈루냐 지역의 강 유역에 만들어진 관개 농경지에서 농민들은 농작물 관개 시설을 개발했는데, 이 시설들을 유지하는 조직―이를테면 이 조직은 수자원 재판소라고 할 수 있다―은 법률 적용을 관장하는 권한이 있었으며 농민들 스스로 이 조직의 활동을 계속 감시했다”고 설명했다. 교양인 제공
이런 파수꾼 민주주의는 앞선 모든 민주주의가 그랬듯 이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세력의 도전을 받고 있다. 반민주적인 극우정당 지지자만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국가들의 오만이다. 중동에선 총과 미사일을 앞세운 ‘민주주의의 전도사’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민주주의를 ‘제국주의 침략자’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존 킨은 ‘민주주의가 진리이며 제1원리이자 보편’이라는 식의 오만함을 버리는 것이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열쇠라고 역설한다. 그는 “민주주의 체제는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달을 때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며 “민주적 이상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자들의, 겸손한 자들에 의한, 겸손한 자들을 위한 통치”라고 말한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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