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공부-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엄기호 지음/따비·1만5000원
공부와 글쓰기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온다. 왜일까. 글쓰기가 생존 또는 돈벌이의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보고서를 잘 써내는 것을 넘어, 글을 잘 써서 ‘파워 블로거’가 된 뒤에, 책을 내고 방송에 출연해서 돈과 명예를 움켜쥔 ‘셀럽’(유명인)이 되고 싶어한다. 글쓰기는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하니, 이런 시류에 편승해 공부에 관한 책도 덩달아 봇물 터진 듯 서점에 깔린다.
그러나 공부·글쓰기 책을 찾는 사람 중엔 반드시 돈벌이 생각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더 알고 싶기 때문에 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사회학자 엄기호의 <공부 공부>는 ‘진짜 공부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 이들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시원한 물 한잔이 돼줄 만하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는 전작을 통해 외면하고픈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포착하는 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엄기호는 자신의 주 종목인 공부에서도 실력을 십분 발휘한다.
공부에 관한 생각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려면 일단 학교를 보아야 한다. 공부에 대한 관념 대부분이 이곳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에서 공부는 신분 상승의 도구였다. 이를 위해선 학생들을 줄 세워야 했고, 변별력을 지닌 문제를 내야 했기에 문제는 더 어려워졌다. 학생들은 ‘해치워 버려야 하는’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전 모의평가 문제지를 받은 학생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990년대 들어 이런 공부에 대항하는 ‘꿈과 행복을 추구하는 교육’이 등장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표어는 그동안 부과됐던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개인을 해방하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행복 교육’도 곧 왜곡됐다. “망상”에 가까운 부모의 기대 탓에 ‘꿈’은 억압의 언어가 됐다. 부모는 자식이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세상 걱정 없이 밝게 자라다, 중2까지 자아 탐색을 마치고, 이후엔 공부나 특정 기술을 정해 ‘폭풍 성장’을 한 뒤 명문대에 가거나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이런 불가능한 시간표에 짓눌린 청소년들은 자신들에게 꿈을 묻는 것 자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997년 아이엠에프(IMF) 사태 이후 상황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공부는 더는 신분 상승이 아닌 생존과 계급 유지를 목표로 하기 시작했다. 중산층은 교육에 한층 더 ‘올인’했고 사교육만이 아니라 친구 관계, 진로, 감정까지 관리해가며 자녀들을 통제했다. 반면 나머지 다수의 학생은 공부를 해도 살아남을 수 없으리란 사실을 깨닫고 공부를 포기했다. 학교도 이들을 포기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저자는 40~50대의 소위 진보적이라는 부모들도 이런 상황을 만든 공범임을 고발한다. ‘양심적인’ 부모들은 문제가 생기면 차분하고 끈질기게 말로 묻고 해결하려 한다. 이 말은 뒤집으면, 말을 잘 못하는 사람, 말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경멸한다는 뜻이다. 이 아이들이 집에선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는 한심한 존재이며 학교에선 ‘재수 없는 가진 집 애’로 따돌림당하는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다.
이런 지옥불을 건너온 어른들은 모두 공부라면 염증을 내게 됐다. 대신 이들을 지배하는 공부는 자격증을 따거나 어학 점수를 올리는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공부’다. 하지만 이런 공부는 자기 파괴의 수렁으로 들어서는 길일 수 있다. 성공은 극소수만 가능한데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단지 ‘노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니 ‘노오오력’을 하라고 재촉하면 사람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파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이런 공부에서 풀려나서 공부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배려의 공부는 먼저 스스로 한계를 아는 것이다. 반면교사가 있다.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고 얇고 넓게 모든 것에 관해 말하는 일군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만사를 단순화해 단정적으로 생각한다. “이런 얄팍한 앎으로 복잡한 문제를 만나면, 그 배후에 자기가 믿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음모론은 이런 앎의 필연적 결과다. 앎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넘어간다. 이것이 이 시대의 반지성주의다.” 여기에 비춰 보면 트위터에서 ‘현재 상황 한 줄 요약’이라는 글이 수없이 리트위트되고, 가짜뉴스나 음모론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 배려의 공부는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2015년 1월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한 9급공무원 취업준비학원에서 한 취업준비생이 수업 중 손수건으로 목의 땀을 닦고 있고 그 앞의 취업준비생은 책상에 엎드려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자기 배려의 공부를 하려면 스스로 어떻게 배우는지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숭산 큰스님의 화두인 ‘오직 모를 뿐’을 붙들고 궁리하던 중 자신은 ‘끊임없이 묻는 사람’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답을 찾아가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 즉 가르치는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자신은 ‘오직 물을 뿐’이란 태도로 배우지만, 어떤 사람은 ‘오직 부딪힐 뿐’이고, ‘오직 따를 뿐’인 사람도 있었다. 배우는 방법은 사람마다 모두 달랐기에 서로 경쟁할 필요는 없었다.
자기 배려의 공부는 자신을 ‘경악’시키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만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에 매혹돼 이후 일정을 팽개치고 매일 조각상을 보러 가던 여인, 공부엔 관심이 없지만 밤하늘의 별을 보고는 경탄을 내뱉던 십대 소년이 느낀 것이 이것이다. ‘나를 경악시킨 무질서의 뒷면에 질서가 있다는 것’, 이것이 자기 배려의 공부로 사람들을 이끈다. 저자는 “지식의 쓸모는 먹고사는 것을 넘어 세상의 아름다움, 우주와 역사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자기 배려의 공부는 자신의 생애에서 두세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삶을 전환해야 하는 시대에 유용한 기예가 될 것이라고.
책의 말미에 이르면, 제목이 <공부 공부>가 된 이유를 알게 된다. 한자로는 ‘工夫 共扶’다. 앞의 공부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배우는 것’을 뜻한다. 뒤의 공부를 풀면 ‘모두를 위한’이란 뜻이 된다. “사회를 외면한 자기 배려는 또 다른 자기계발이 되고 말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기계발이란 이 모든 과정을 사적인 자원을 동원해 사적으로 실행하고 사적으로 그 열매를 독점한다는 사사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공동선이 되는 사회를 도모할 때 자유는 위험한 것도 아니고 자유가 위험해지지도 않는다. 자기를 배려하며 멋진 삶을 추구하는 기예는 그런 ‘좋은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기예’로 이어져야 한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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