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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관료 못 잡으면 개혁도 없다

등록 2017-07-06 18:55수정 2017-07-06 19:09

강명관의 고금유사
1795년 5월 22일 전라도 암행어사 정만석(鄭晩錫)은 27개 조목의 보고서를 올린다. 골자는 균역청과 같은 중앙의 관서 또는 지방 행정기관 등의 남징(濫徵)에 관한 것이었다. 백성들에게 응당 면세해 주어야 할 것을 해 주지 않거나, 이중으로 세금을 거두거나, 납세할 대상이 죽거나 달아났을 경우, 이웃과 친족들에게 징수하는 남징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보고서를 축조 검토해 해결 방안을 찾아볼 것을 비변사에 명했다. 얼마 뒤 검토 결과가 올라왔다. 요점은 이렇다. 문제의 발본적 해결을 위해 토지의 전면적 측량, 곧 양전(量田)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양전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불가능하다. 우선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에서 현황을 조사하게 하고, 양전 역시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하도록 하자. 한편 고을 수령들은 오류투성이인 호적과 군적(軍籍)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적 상황을 따라서 수세(收稅)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황구첨정·백골징포(어린이나 죽은 사람으로부터도 세금을 징수하는 것)가 발각되면 엄벌에 처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고을 수령들에게 명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정만석이 보고한 사례는 전라도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었다. 동일한 사례는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차고 넘친다. 다만 이런 사례에 대한 조정의 대책이란 항상 다음과 같았다. 1) 문제가 심각함을 인정한다, 2)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현재 상황으로는 불가능하니,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3) 우선 담당 관리에게 법과 규정을 준수할 것을 강력히 지시해야 할 것이다. 양전의 경우를 들어보자. 농민의 몰락, 이산(離散)을 막기 위해서는 토지 정책을 바꾸어야 할 것인데, 당연히 그것은 양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측량술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비용이 많이 들어서, 지금 흉년이라서, 수령이 무능해서 할 수 없으니, 때를 기다려 해야 할 것이고, 우선은 관찰사와 수령에게 법과 규정을 지키라고 명령하자!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비변사의 대책을 읽은 뒤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한 조목, 하나의 일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혜택을 끼치고,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방책은 없었다.” 그는 어떤 고위관료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뇌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일을 신칙하는 공문을 지방에 내려 보내면, 지방에서 조정을 경시하는 풍조만 조장하게 된다.” 비변사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수령을 단속하게 하자는 대책은 역효과만 거둔다는 뜻이다.

정조는 명철한 사람이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를 보면, 그는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철해도 그를 둘러싼 조정의 관료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조는 알다시피 나름대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당시의 지배계급은 언제나 하나마나 한 대책을 내놓는 것으로 저항했다. 이것이야말로 개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관료권력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입으로 개혁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관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개혁에 사실상 저항하는 일이 숱하게 많았고, 또 많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개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 적잖이 걱정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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