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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혜린과 문학소녀들의 잔혹사

등록 2017-06-29 20:07수정 2017-06-30 11:14

낭만성, 부르주아, 서구동경…
‘읽고 쓰는 여성’ 폄훼의 역사
경멸과 비웃음 정당한가 질문
문학소녀-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반비·1만5000원

‘요절한 천재’ 전혜린(1934~65)은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특히 ‘문학소녀’들에게.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과 판타지를 자극하며 매혹적인 청춘의 감각을 담은 그의 글은 치명적이었지만 언젠가 졸업해야 하는 텍스트로 인식되기도 했다. 지식인 남성뿐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까지 ‘자의식 과잉, 지적 허세로 뭉친 미숙한 문학소녀’라며 전혜린을 스캔들로 소비하거나 비판하는 행렬에 동참하곤 했다. 왜 전혜린과 문학소녀는 한국 사회에 불편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을까.

“현재 시점에서 전혜린을 비판적으로 조롱하는 시각, ‘부잣집 딸내미의 교양 있는-공주-코스프레’라는 시각은 어느 정도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고려하며 교정되어야만 한다.”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은 <문학소녀>에서 전혜린에 대한 50여년간의 가차없는 비평을 반박한다. 전혜린의 생애와 글에 대한 사실(팩트)과 당시 시대상을 낱낱이 파헤치며 ‘읽고 쓰는 여자들’에게 가해져 온 남성 지식인 사회의 조롱, 비평을 빙자한 불공정한 시선을 자세히 살핀 이 책은 여성 문인 또는 지식인이 한낱 ‘부르주아적 속물’로 손쉽게 평가절하되는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문학소녀는 왜 안전하게 놀려댈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지는지” 질문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에 ‘읽고 쓰는 여자’가 보내는 선전포고문이자 진지한 변론이다.

국가 주도 근대화를 표방한 박정희는 1963년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소녀의 손이 고운 것은 미울 리 없겠지만 (…) 특권 지배층의 손을 보았는가.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썼다. 책 속의 시 구절은 문학소녀를 느닷없는 주적으로 내세운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 (…) //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전혜린은 서울로 돌아온 뒤 오뉴월에도 눈이 내리곤 하는 독일 날씨 때문에 습관이 된 옷차림을 한여름에도 고집했다고 한다. 이런 선택과 취향, 열정적 환상과 이를 드러내는 포즈는 ‘문학소녀’를 비웃는 근거가 되곤 했다고 <문학소녀> 지은이 김용언은 밝힌다. 이덕희 사진, 반비 제공
전혜린은 서울로 돌아온 뒤 오뉴월에도 눈이 내리곤 하는 독일 날씨 때문에 습관이 된 옷차림을 한여름에도 고집했다고 한다. 이런 선택과 취향, 열정적 환상과 이를 드러내는 포즈는 ‘문학소녀’를 비웃는 근거가 되곤 했다고 <문학소녀> 지은이 김용언은 밝힌다. 이덕희 사진, 반비 제공
전혜린은 전형적인 ‘문학소녀’였고 그를 향한 비판의 근거도 분명해 보였다. 1934년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기대 속에 자란 그의 ‘태생’은 사후에도 반복 재생산되었으니, 아버지 전봉덕(1910~98)은 친일파로 종종 분류되며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 속에 모습을 바꾸며 출세의 길을 따랐던 인물이었다. 백범 김구의 암살 배후로 계속 의심받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런 아버지의 존재에서 출발한 전혜린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거쳐 서울대 법대에 다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의 계급성과 삶의 행로는 ‘나른한 중산층 지식인 여성’이라는 부정적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전혜린의 유학 일기 곳곳에서는 가난과 노동의 피로와 불안이 교차한다. 앳된 임신부로서 만삭의 몸으로 고단한 가사노동을 이어가고 번역과 집필 노동을 쉬지 않았던 전혜린에게 ‘땀과 노동을 모른다’는 비판이야말로 여성노동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가 아닐까. 그림자 노동에 대한 전혜린의 명백한 기록은 그러나 진정성 있는 진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0~60년대 일본어 번역 없이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를 비롯한 현대 독일문학을 직접 서구의 언어로 읽고 옮긴 독일문학 번역가로서의 전문성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소설가도 시인도 문인도 작가도 아니라는, 전혜린을 향한 반백년간의 비판은 온당치 않다고 지은이는 변론을 펼친다.

또 하나의 비판은 당시 한국 사회의 드문 지식인으로서 전혜린이 조국에 대한 관심을 사소하게 취급했다든지 냉담하게 거리감을 두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혜린은 4·19 혁명, 5·16 쿠데타 등에 비평이나 실천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일원으로 수렴되지 않은 실존적 주체를 꿈꾸었던 주변부 여성 지식인의 정체성”(김양선)을 가진 그였기에 한국보다 유럽의 위계질서가 해방으로 느껴졌을 수 있다고 책은 해명한다. “그녀의 수필-기행문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자의식이나 모멸의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나에겐 조국이 없다. 조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여성으로서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라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물론 전혜린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으나 ‘조국’보다 ‘세계’ 시민으로서 스스로를 상정했다.

전혜린이 독일 유학 시절 알 수 없는 이유로 전기풍로가 폭발한 뒤 밥을 지을 수 없어 음식을 사다 먹었다는 레스토랑 ‘제로제’. 최근까지도 한국인 관광객이 찾곤 했다고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혜린이 독일 유학 시절 알 수 없는 이유로 전기풍로가 폭발한 뒤 밥을 지을 수 없어 음식을 사다 먹었다는 레스토랑 ‘제로제’. 최근까지도 한국인 관광객이 찾곤 했다고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실 지적 허영과 자의식 과잉으로 평가받아온 전혜린에 대한 이미지는 ‘편집된 진실’이다.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의 수신인으로, 전혜린을 과장된 문학소녀라고 비하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던 ‘장 아제베도’라는 애칭조차 원래 적혀 있던 실명을 숨기기 위해 그의 사후 편집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1950년대 후반 독일에서 아름답고 독특한 한국어 에세이를 쓰고자 노력”한 작가로서, 눈 밝은 번역가이자 출판 기획자로서 전혜린을 재평가하는 이 책은 “소녀적” “여류”라는 등의 손쉬운 낙인에 대한 배제와 혐오, 수난의 계보를 그려낸다. 전혜린은 “여류 문인이 겪은 호기심과 조롱과 모욕적인 숭배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도서시장을 움직이는 ‘책 읽는 여자’에 겹치는 ‘소비’ ‘유행’이라는 속물적 이미지, ‘김치녀’ ‘된장녀’ 같은 멸칭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반백년 만에 본격적으로 재조명한 선배 작가에 대해 ‘읽고 쓰는’ 여성 작가, 평론가들이 쓴 이야기(추천사) 역시 기껍고도 눈물겹다. “여성의 성취를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사회를 향해 오직 자신의 글쓰기로 투쟁한 예술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전혜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시다.”(정여울 문학평론가), “그 시절의 문학소녀들과 이 책을 함께 읽고 싶다. 어쨌든 우리는 계속 읽고 쓸 것이므로.”(조남주 소설가, <82년생 김지영>), “여성들의 읽기와 쓰기의 의미를 결정하고 구성하는 해석 투쟁이 드디어 시작됐다는 선언.”(오혜진 문학평론가). 전혜린의 책을 든 손이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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