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우먼 인 캐빈 10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위즈덤하우스(2017) 여행의 장점은 일상의 상식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난다는 데 있다. 여행에는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인생을 끌고 간다는 기대가 따라온다. 하지만 예상할 수 없다는 여행의 장점은 순식간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모험심이 무모함이 되고, 들뜬 감정은 공포로 바뀐다. <우먼 인 캐빈 10>은 여행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만난 여자의 이야기이다. 잡지사 기자로 10년을 고군분투해온 로 블랙록은 백만장자인 리처드 불머와 앤 린스테드 부부가 주최하는 크루즈 여행에 참석하게 된다. 여행 직전에 강도를 당한 충격은 남아 있었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사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로는 크루즈에 승선한다. 9호실을 배정받은 로는 10호실의 여자를 마주치지만, 저녁 식사 모임에서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한밤, 10호실에서 누군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로는 옆방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직감하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알지 못한다. 여자의 모습을 본 사람도 한명도 없다. 아니, 10호실의 여자는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영어를 그대로 받아적은 번역 제목이 모호하지만, <우먼 인 캐빈 10>은 현대 영미권 추리소설의 주류인 여성 심리 스릴러에 애거서 크리스티 풍의 고전 소설적 풍미를 더한 훌륭한 작품이다.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여성을 그린 소설은 <내가 잠들기 전에>(S. J. 왓슨, 랜덤하우스 코리아), <나를 찾아줘>(질리언 플린, 푸른숲), <걸 온 더 트레인>(폴라 호킨스, 현대문학) 등 많았고, 이들 모두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얻기도 했다. 1944년 조지 큐커 감독의 영화로 유명해진 <가스등> 이후로, 여성이 맞대면한 조작적 현실을 그린 작품들이 계속 있었지만, 과거의 심리 스릴러 장르가 여성을 피해자로 묘사했다면 현재의 여성 인물들은 사건을 이끄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우먼 인 캐빈 10> 또한 위기에 처한 낯선 여성을 구하는 다른 여성의 서사이다. “위험에 빠진 처녀”는 추리소설에서 자주 활용되었던 소재지만, 그들을 구하는 건 특별히 지적이고 정의감이 강한 남성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여성들의 구원자는 자기 자신이나 역시 불안한 상태에 있는 다른 여성이다. <걸 온 더 트레인>에서 없어진 여자를 알아차리는 건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여성이었듯이, 이 소설에서도 실종된 여자의 존재를 찾아나서는 유일한 사람도 아직 습격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이었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였고, 피해자가 되기 쉬운 사회에 살고 있기에 타인의 곤경을 모른척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우애의 핵심이다. <우먼 인 캐빈 10>에서 좋았던 점은 낯선 이에 대한 나의 호의가 내가 곤경에 빠지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구한다는 결말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진실은 이제 실제이든 은유이든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이에게 희망찬 소식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 자신이 불안하다고 해도, 우리는 곤경에 빠진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할 것이며, 그 덕에 살아남을 것이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위즈덤하우스(2017) 여행의 장점은 일상의 상식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난다는 데 있다. 여행에는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인생을 끌고 간다는 기대가 따라온다. 하지만 예상할 수 없다는 여행의 장점은 순식간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모험심이 무모함이 되고, 들뜬 감정은 공포로 바뀐다. <우먼 인 캐빈 10>은 여행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만난 여자의 이야기이다. 잡지사 기자로 10년을 고군분투해온 로 블랙록은 백만장자인 리처드 불머와 앤 린스테드 부부가 주최하는 크루즈 여행에 참석하게 된다. 여행 직전에 강도를 당한 충격은 남아 있었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사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로는 크루즈에 승선한다. 9호실을 배정받은 로는 10호실의 여자를 마주치지만, 저녁 식사 모임에서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한밤, 10호실에서 누군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로는 옆방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직감하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알지 못한다. 여자의 모습을 본 사람도 한명도 없다. 아니, 10호실의 여자는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영어를 그대로 받아적은 번역 제목이 모호하지만, <우먼 인 캐빈 10>은 현대 영미권 추리소설의 주류인 여성 심리 스릴러에 애거서 크리스티 풍의 고전 소설적 풍미를 더한 훌륭한 작품이다.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여성을 그린 소설은 <내가 잠들기 전에>(S. J. 왓슨, 랜덤하우스 코리아), <나를 찾아줘>(질리언 플린, 푸른숲), <걸 온 더 트레인>(폴라 호킨스, 현대문학) 등 많았고, 이들 모두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얻기도 했다. 1944년 조지 큐커 감독의 영화로 유명해진 <가스등> 이후로, 여성이 맞대면한 조작적 현실을 그린 작품들이 계속 있었지만, 과거의 심리 스릴러 장르가 여성을 피해자로 묘사했다면 현재의 여성 인물들은 사건을 이끄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우먼 인 캐빈 10> 또한 위기에 처한 낯선 여성을 구하는 다른 여성의 서사이다. “위험에 빠진 처녀”는 추리소설에서 자주 활용되었던 소재지만, 그들을 구하는 건 특별히 지적이고 정의감이 강한 남성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여성들의 구원자는 자기 자신이나 역시 불안한 상태에 있는 다른 여성이다. <걸 온 더 트레인>에서 없어진 여자를 알아차리는 건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여성이었듯이, 이 소설에서도 실종된 여자의 존재를 찾아나서는 유일한 사람도 아직 습격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이었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였고, 피해자가 되기 쉬운 사회에 살고 있기에 타인의 곤경을 모른척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우애의 핵심이다. <우먼 인 캐빈 10>에서 좋았던 점은 낯선 이에 대한 나의 호의가 내가 곤경에 빠지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구한다는 결말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진실은 이제 실제이든 은유이든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이에게 희망찬 소식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 자신이 불안하다고 해도, 우리는 곤경에 빠진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할 것이며, 그 덕에 살아남을 것이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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