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인공지능과 번역의 미래'란 주제로 열린 제4회 번역 대담에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오른쪽)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번역을 두고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교수(왼쪽)와 대담을 벌이고 있다. 이화여대 제공
중국의 바둑기사 커제가 1, 2국에 이어 지난 27일 열린 마지막 3국에서도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에 완패를 당했다. 인공지능의 침범에 위기감을 느끼는 영역은 바둑을 포함해 거의 모든 분야에 이르지만, 번역가들의 위기감은 남다르다. 구글 번역이나 네이버 파파고처럼 인공지능 번역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되고, 완성도도 매끄럽게 읽히는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커제의 3국이 열린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선 ‘인공지능과 번역의 미래'란 제목으로 제4회 번역 대담이 열렸다.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가 대담자로 나와 강연을 한 뒤 유명 번역가인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교수와 대담을 하는 방식으로 4시간 동안 진행됐다. 250명가량의 통번역가들과 관련 학과 학생들이 자리를 다 채우고도 강연장 뒤에서 여러명이 서서 대담을 들을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정 교수는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을 소개하며 인공지능 번역이 인간 번역가들의 업무를 상당 부분 대체할 것이라 예측했다. 양쪽 언어권의 문화를 각각 이해한 뒤 각 문화권에 있는 가장 좋은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은 번역이라고 정의한다면, 다양한 문화권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인공지능 번역이 인간을 결국 앞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2월 국제통번역학회가 번역가와 인공지능 번역기 간의 공개 대결을 벌여 속도나 비용 문제는 제외한 뒤 정확도 면에서만 ‘인간의 번역이 더 뛰어났다’고 단면적으로 판정한 일을 두고 “앞으로도 이런 격차가 유지될 거라고 낙관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충분한 데이터가 쌓이면 구글에 유리할 것이다. 바둑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처럼 번역도 ‘문장 이해’ 단계를 건너뛴 인공지능 번역이 결과 측면에서 인간 번역을 앞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 역시 인공지능 번역 수준이 인간 번역을 넘어서기 이전이라고 하더라도, 통역·번역가의 일감이 줄어드는 것은 막기 어렵다고 봤다. 일반인들에게 ‘이쯤 되면 쓸 만하네’란 생각이 드는 순간 번역가의 일감 상당 부분이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인공지능 번역은 거의 공짜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93%의 정확도만 보인다고 해도 번역에 드는 비용이 거의 없고 속도가 무척 빠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번역의 질이 특별히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인공지능에 번역을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활자 번역보다 속도가 더 중요한 동시통역의 경우엔 좀더 파괴적인 결과가 예상된다. 인공지능 번역은 사람이 말을 한 뒤 통역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문자 그대로 ‘동시에’ 번역이 가능하고, 음성과 자막을 같이 제공하며, 수십개 언어로 통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연이 이 대목에 이르자 강연장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기도 했다.
정 교수는 인공지능 번역이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도 제기한다고 짚었다. 정 교수는 “인공지능 번역을 개발하는 과학기술자들은 기술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막는 장벽을 없애주려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며 “나같이 지식을 유통하며 대가를 받는 지식소매상 교수들이 카피레프트 운동을 보며 죄책감이 드는 것처럼, 통역가, 번역가들은 이런 윤리적인 고민에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하지만 인공지능 번역이 인간 번역을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봤다. 정 교수는 “번역가는 다양한 인공지능 번역기의 특성을 분석하면서 장단점을 파악해 더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 통역번역대학에서 적극적으로 인공지능 번역을 교육과정 안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담자 정영목 교수도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보다 영역을 넓히고 인류에게 공헌하는 측면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번역가들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정 교수는 ‘개성’과 ‘스타트업 정신’으로 정리했다. 그는 “문학 작품처럼 정성스레 쓰인 고급스러운 표현은 데이터가 적어서 인공지능 번역이 잘 작동하기 힘들 것”이라며 “번역에 개성이 묻어나서 독자들이 ‘저 사람의 번역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 번역가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 교수는 “기계들이 가혹하게 ‘당신이 하는 일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창조적입니까’라고 묻는 상황이다. 번역의 본질에 충실하고 정진하는 선배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번역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걸 시도해야 한다. 이런 스타트업 정신으로 한 시도 100개 중 5개쯤 성공하겠지만 그런 창의적인 시도들이 후배들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별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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