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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원더우먼의 모델은 페미니스트 마거릿 생어였다”

등록 2017-05-18 19:41수정 2017-05-18 21:46

여성 슈퍼히어로 탄생사의 비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맥락 연관
하버드 역사학 교수 탐사로 밝혀
원더우먼 허스토리
질 르포어 지음, 박다솜 옮김/윌북·1만7500원

1914년 미국, 8쪽짜리 월간지 <여성 반란> 창간호에는 짧은 선언문이 실렸다.

“어째서 여성 반란인가? 여성의 천성 깊은 곳에 혁명의 정신이 잠들어 있음을 믿기 때문에. (…) 여성의 자유는 그녀를 노예로 만드는 것들에 대항할 내면의 혁명 정신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여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에 맞서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의식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잡지를 창간한 ‘페미니스트 시조새’ 마거릿 생어(1879~1966)와 오늘날 페미니즘 사이에는 ‘잃어버린 고리’가 있다. 1972년 나온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널 <미즈> 창간호는 그 고리를 채우려는 시도였을까. 표지에는 최초의 여성 슈퍼히어로 ‘원더우먼’이 그려져 있었다. 남성들의 눈요기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선정적인 차림을 한 이 여성 영웅은 자주 악당에게 잡혀 결박당했고, 입에 재갈이 물렸으며, 그러면서도 매번 스스로 탈출하곤 했다. 그러니 헷갈릴 만도 하다. 원더우먼은 백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인가, 페미니스트 영웅인가?

<원더우먼 허스토리> 지은이 질 르포어. ⓒDari Michele, 윌북 제공
<원더우먼 허스토리> 지은이 질 르포어. ⓒDari Michele, 윌북 제공
<원더우먼 허스토리>는 1941년 2차 세계대전 때 첫선을 보인 원더우먼의 탄생 배경을 치밀하게 복원했다. 지은이 질 르포어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는 16일 <한겨레>와 주고받은 전자우편에서 “산아제한과 낙태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역사를 조사하려 <뉴요커> 지난 기사를 뒤적이던 중, 원더우먼이 1916년 미국가족계획연맹을 기초한 인물 마거릿 생어를 본질적인 모델로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독자 수 1천만명에 달하던 만화 <원더우먼>을 낳은 원창작자는 당시 유명 심리학자였던 윌리엄 몰턴 마스턴(1893~1947).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법학 석사, 심리학 박사를 받은 뛰어난 학자로서 젊은 시절, 전투적 페미니스트 에멀라인 팽크허스트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세계 최초로 거짓말 탐지기를 고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더우먼…>의 지은이 르포어 교수는 끈질긴 인내와 취재력을 바탕으로 4년에 걸쳐 마스턴의 가족들을 만나고 대학 기록물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아마존 공주 원더우먼의 ‘탄생 설화’ 속에 두 여성과, 여성운동사가 숨어 있음을 밝혀냈다. 그는 “마스턴이 청년기에 여성참정권 운동가, 페미니스트, 산아제한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두 여자와 비밀스러운 삶을 영위했고 여성에 대해 강력하면서도 모순적 견해를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사실 원더우먼은 마스턴뿐 아니라 그의 두 부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스턴은 비밀리에 두명의 여성과 중혼을 했고, 이 중 한 사람이 바로 페미니스트 마거릿 생어의 조카인 올리브 번이었다. 마스턴의 ‘공식적인’ 배우자 엘리자베스 할러웨이 또한 여성참정권 운동을 벌였던 페미니스트였다.

1972년 <미즈> 창간호 표지. 편집자들은 자신들이 유년 시절에 접한 1940년대 원더우먼을 내세워 1910년대 페미니즘과 70년대 페미니즘을 이으려 했다고 르포어 교수는 밝힌다. 윌북 제공
1972년 <미즈> 창간호 표지. 편집자들은 자신들이 유년 시절에 접한 1940년대 원더우먼을 내세워 1910년대 페미니즘과 70년대 페미니즘을 이으려 했다고 르포어 교수는 밝힌다. 윌북 제공
원더우먼을 탄생시킨 마스턴은 사도마조히즘 성향을 지닌 자유연애주의자였다. 원더우먼이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찬사를 받은 반면, 또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을 받은 까닭도 그의 중층적인 면모 때문이 아닐까. 거짓말 탐지기를 만든 심리학자의 창작물답게, 원더우먼은 진실을 말하게 하는 올가미를 갖고 있었다. 원더우먼이 늘 차고 다니던 팔찌는 총탄을 막는 효능이 있었지만 남성이 여기에 쇠사슬을 걸면 여성 영웅은 모든 힘을 잃었다. 마스턴은 이것이 현실에서 여성이 남성의 지배에 종속될 때 일어나는 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더우먼은 ‘페미니즘 프로파간다’라는 얘기였다.

원더우먼 탄생의 주역들. 왼쪽부터 1926년의 엘리자베스 할러웨이 마스턴, 올리브 번, 윌리엄 몰턴 마스턴, 에설 번. 올리브 번이 펜으로 적은 글씨가 보인다. 윌북 제공
원더우먼 탄생의 주역들. 왼쪽부터 1926년의 엘리자베스 할러웨이 마스턴, 올리브 번, 윌리엄 몰턴 마스턴, 에설 번. 올리브 번이 펜으로 적은 글씨가 보인다. 윌북 제공

책은 마스턴과 그 주변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전기, 원더우먼의 탄생 설화, 캐릭터의 변천, 미국 페미니즘의 역사가 무척이나 복잡하게 얽혀들어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선사한다. 마스턴과 여성들의 비밀 탓에 왜곡되긴 했지만 원더우먼은 1900~1910년대 여성참정권, 페미니즘, 산아제한 운동의 산물이자 60~70년대 제2페미니즘 물결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원더우먼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순종적인 여자로 변해갔지만, “여성 인권을 위한 투쟁은 강처럼 끊임없이 구불구불 흘렀다.”

최근 대중적인 페미니즘 흐름에 대한 소감을 묻자 르포어 교수는 “세계적인 페미니즘 붐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페미니즘에 대한 언론의 호들갑이 있을 뿐”이라고 잘라 답했다. 그의 말처럼 100여년 전 마거릿 생어의 ‘여성 반란’이 외친 혁명의 정신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수면이 잠잠했던 것으로 여겨지던 40년대의 페미니즘이 <원더우먼>이라는 만화책 속에 열심히 물결쳤듯, 지금도 페미니즘은 다수가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서 거세게 분투를 벌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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