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독서
홍나래·박성지·정경민 지음/들녘·1만5000원 여성의 주체성은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이전인 전근대에도 그 이름을 갖고 있었음을 한국 고전서사로 밝히는 <악녀의 재구성>. 이 책에 따르면 ‘여성주체성’의 옛말로는 ‘팔자’ ‘기’ ‘복’ 등이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지은이들은 ‘원조 걸크러시(반할 만큼 멋진 여성)’ 18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들은 비정한 어머니, 문란한 아내, 드센 며느리, 곧 악녀로 불렸다. 모성으로부터 탈주한 여성으로 책은 시작된다. 신도 못 당하는 배포란 이런 것. 손병사의 어머니 광주 안씨는 시댁에서 모시는 신당을 따라 모실 명분이 없다며 뜯어 없애버린다. 아들들이 차례로 죽고, 다시 모시지 않으면 남은 아들도 잡아가겠다는 신의 협박과 “그러라”는 안씨. 결국 신은 목숨을 데려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며 스스로 물러난다. 사랑하는 인간 남자가 자신을 버리자 자식을 죽여버리는 ‘곰나루 전설’ 속 ‘곰 여인’은 모성보다 에로스를 욕망하는 여성을 상징한다. 희생과 인고를 벗겨낸 자리엔 주관과 욕망이 버젓하다. 이야기는 열녀, 양처 이데올로기에서 탈출한 여성들로 이어진 다음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권력행사”를 선취한 주체적 여성을 고구려부터 구한말까지 불러낸다. 가부장제에 눌려 목소리를 삼킨 가슴에 새겨진 한은 여성이 약자와 소수자를 동여매듯 안을 수 있는 문화적 형질이 됐다. 이는 신성을 닮았다.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낙인의 열감보다 더 뜨거운 내면의 불을 끄지 않았던, 즐길 줄 아는 언니들의 말은 봄에 새겨듣기 더 좋다. “꽃 없이는 재미없어 명년 삼월 놀아보세”.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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