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연 2015년 12월 총선에서 자신들의 지지율 기록을 넘어선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는 2016년 6월 다시 치른 총선에서 국회의원 71명을 당선시키며 제3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마드리드/AP 연합뉴스
시민 쿠데타-우리가 뽑은 대표는 왜 늘 우리를 배신하는가?
엘리사 레위스·로맹 슬리틴 지음, 임상훈 옮김/아르테·1만5000원
2016년 6월23일 영국 국민들은 국민투표로 유럽연합 탈퇴를 가결했다. 그해 11월8일, 미국에서는 대선 도전만으로도 놀라웠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현재 대선 캠페인이 진행중인 프랑스에선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 지지율 선두를 고수하고 있다. 대중은 정치 무기력증에 빠져 있고, 민주주의는 비틀댄다. 그 틈새를 극우가 공략하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완전히 다른 정치도 있다. 대중은 선거만 하지 않는다. 엄청나게 시끄럽게 토론하고, 직접 결정한다. 의원들은 시민들의 뜻을 조용히 의회에 전달할 뿐이다.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액체 민주주의’라는 위임 투표 시스템으로 시민은 투표권을 임시 대표 또는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돌려받을 수도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치가 가깝다.
<시민 쿠데타>는 최근 몇년 동안 세계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민주주의 정치실험을 발로 뛰며 취재한 기록이다. 프랑스의 젊은 정치학자이자 시민운동가인 두 지은이는 서구에서 극우 정당이 승리하는 ‘정치적 반동’을 보며 민주주의 혁신방안을 찾아 2년 동안 80여명의 정치인, 일반 시민, 해커, 연구원 등을 만났다. 이들은 “국민은 투표, 나머지는 정치인”이 하는 지금의 대의민주제가 근본적인 문제에 빠져 있다고 보며 소외된 유권자, 곧 ‘버스 맨 뒤쪽에 앉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정당과 시민의 콜라보’를 제안한다.
2016년 10월29일 아이슬란드 총선에서 개표 현황을 지켜보며 환호하는 해적당 비르기타 욘스도티르 대표(가운데)와 당원들. 레이캬비크/AFP 연합뉴스
책은 ‘수동적 시민’을 양산하는 지금의 민주주의를 우선 추궁한다. 21세기 신자유주의 앞에 19세기식 민주주의는 무력했다. 소수에게 경제·정치권력이 집중된 지 오래다. 정치는 직업화하고 비선출 전문가 관료들이 행정을 장악한 가운데 정치권은 금융권력에 종속돼 직무유기를 일삼는다. 세계 곳곳의 화난 시민들은 ‘봉기의 밤’(프랑스) ‘분노하는 자들’(스페인) ‘오큐파이어’(미국 등) ‘우산 혁명’(홍콩)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이 저항의 운동장에서는 누구나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었고, 우두머리와 공식대변인을 두지 않으며 ‘구세주 신화’를 거부했다. 지은이들은 여기서 새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대표적인 예가 스페인의 정치실험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다. 2014년 1월 반자본주의와 시민사회 대표를 표방한 젊은 대학교수들이 만든 이 프로젝트는 ‘분노를 정치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20일 만에 10만명 이상의 당원을 모았고, 2015년 12월 총선에서 자신들의 지지율 기록을 넘어섰으며 2016년 6월 다시 치른 총선에서 국회의원 71명을 당선시키며 제3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회합으로 토론을 활성화하면서 선거 승리 전략을 세웠다. 의원들의 최대 임금은 국가 최저임금의 3배로 못박았다. “남들과 같은 수준의 수입을 얻을 때 비로소 남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기 때문”이다.
2008년 30살에 프랑스 중도파 정당 모뎀을 뛰쳐나온 키트리 드빌팽은 ‘나의목소리’ 실험을 시작했다. 이 정당은 토론, 디지털 투표 플랫폼, 시민 배심원 등 민주주의 메커니즘을 실천하며 소셜 네트워크로 국회의원 후보를 초대하는 ‘모집 공고’를 냈다. 2016년 5월 총선에 나갈 후보자는 추첨으로 결정했다. 겨우 며칠간 선거운동을 했고 돈도 거의 없었지만 ‘나의목소리’ 후보는 4.25%의 표를 얻어 프랑스공산당(3.83%)을 앞섰다.
2013년 8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당’ 의원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정치적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대리인으로서 데모크라시 오에스(OS) 플랫폼에 밝힌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충실히 전달만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두달 만에 참가한 지방선거에서 이들은 1.2%를 득표해 2차 투표까지 올라갔다.
인터넷 기본권을 수호하려고 만들어진 ‘해적당’ 운동은 세계 40개국으로 뻗어 나갔다. 독일 해적당은 2011년부터 직접민주주의 도입, 투명성 요구 등을 목표로 당 차원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으며 2014년 유럽의회에 의원을 진출시켰다. 아이슬란드의 2016년 가을 총선에서 이 당은 좌파녹색당과 공동 원내 제2당에 올랐다. 헌법 개정이나 법안 마련도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사례가 있다. 2008년 아이슬란드에 부패 스캔들이 터진 뒤 분노한 국민들은 민주주의 운영 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2009년 들어선 첫 좌파 정부는 시민 대표에게 개헌 법안 마련의 권한을 주기로 했고, 시민 1500여명이 모여 온종일 국가의 이념, 가치, 민주주의, 교육, 미래를 놓고 토론했다. 최종 결정된 새 헌법안은 결국 마무리되지 못했지만 시민참여형 개헌 모델로 한국 사회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2004~2007년 캐나다 몇몇 주와 네덜란드에서, 2013년 에스토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시민참여형 법안을 실험했다.
2009년 아이슬란드는 시민들이 헌법 개정을 논의하는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국민의회 2009’ 누리집 갈무리
책은 ‘시민 테크노’를 소개하는 데도 공을 들인다. 디지털 기술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민주주의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시민 발의제 지원 온라인 플랫폼 ‘오픈 미니스트리’, 법률 크라우드 소싱을 위한 ‘데모크라시 오에스’, 시민 참여 민주주의 허브 ‘디사이드 마드리드’, 집단 지성을 발휘해 법안의 ‘디테일에 숨은 악마’를 미리 찾아낼 수 있도록 한 ‘의회와 시민’ 플랫폼 등을 소개한다.
민주주의의 변화를 위해선 권력에 맞선 권력과 제도혁신 또한 필요하다. 책은 일시적으로 해당 문제만 다루는 시민의회 구성, ‘미디어 제국’에 대항한 시민 언론 설립, 공공 자본과 예산을 감시하는 ‘시민 검증단’, 환경 활동가인 ‘시민 측정가’, 기업 로비 네트워크에 맞서는 ‘안티 로비’의 필요성도 힘주어 말한다.
2016년 3월 말, 수천명의 프랑스인들이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을 포함해 수많은 도시 공공장소를 점령했다. 그들의 슬로건은 ‘#봉기의밤’이었다. 파리/EPA 연합뉴스
‘민주주의 세계일주’ 끝에 지은이들은 “자기 땅의 주인이 된다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핵심”이라고 결론 내린다. 시민이 스스로 운명을 걸머지려 할 때 주의해야 할 점도 알린다. “순진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기존 시스템의 저항을 얕보아서도 안 된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특권에 강하게 집착하며, 시민들의 본격적인 정치 개입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매끄러운 번역과 섬세한 편집이 서구에서 벌어진 실험의 거리감을 좁히며 정치 무력감을 물리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무력감은 자기결정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니까.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