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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페미니즘 독립출판잡지, 지식과 재미 다 ‘잡지’

등록 2017-03-20 09:23수정 2017-03-20 09:45

2006년 ‘if’ 이후 끊긴 페미니즘 잡지
‘소녀문학’ ‘소문자에프’ 등으로 이어져

여성적 문체 막는 문단에 대항해서…
트렁크에 납치 ‘맥심’ 표지에 화나서…
문화·연애·영화·미러링 각자 목표 분명

마음 맞는 20~30대 커뮤니티서 모여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 조달하지만
생업과 병행·자금 부족 등 한계 부딪혀
“여성주의 활동 재단서 지원 고려 필요”
“왜 페미니즘인가?”

1997년 5월에 창간한 계간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는 창간사 제목부터 도발적이었다. 이문열의 소설 <선택>을 둘러싸고 페미니즘 논쟁이 촉발되면서 태어난 잡지는 창간호 특집으로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을 다루며 남성중심주의 사회에 ‘맞짱’을 떴다. 2006년 마침표를 찍기까지 9년간 <이프>는 호주제 폐지, 군가산점 문제, 종교계 성차별 등 다양한 이슈를 건드리며 페미니즘 대중화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요리, 인테리어, 패션, 화장법을 주로 한 여성잡지와도 분명한 차별성을 보였다.

<소녀문학>
<소녀문학>
<이프>가 태어난 지 딱 20년이 되는 올해, 맥이 끊겼던 페미니즘 잡지의 계보가 다시금 이어지고 있다. 잡지 구독자 확보는 기본이고 기업 광고영업으로 놀라움을 안겼던 <이프>와 달리, 기업 광고에서 자유로운 독립출판잡지 형식이다. 이 ‘2세대 페미니즘 잡지’는 <소녀문학> <무비 페미니즘> <사심> <소문자 에프> 등이다. 척박한 출판 시장에서 페미니즘 잡지의 탄생을 이끈 건 메갈리아 논쟁,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살해사건, 해시태그 페미니즘과 ‘#오타쿠_내_성폭력’ ‘#문단_내_성폭력’ 등 여성혐오와 관련한 논쟁들이었다.

<소문자에프>
<소문자에프>
■ 대중적인 언어로 취향 저격 <이프>가 ‘페미니즘 종합잡지’ 형식이었다면, 요즘 쏟아지는 잡지들은 문학·영화·사진·연애 등 다루고자 하는 분야가 분명하다. 2015년 6월 첫선을 보인 <소녀문학>은 문예지와 사진집을 결합한 형태로 창간되었다.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편집장 이하림(21)씨는 “남성 중심의 심사위원이 자리한 등단제도에서 인물은 감상적이면 안 되고, 문장은 단단해야 하며 여성문체면 안 된다는 식으로 여성의 발화를 막는 문단 담론에 항의하고 싶었다”고 했다. 메갈리아 논쟁이 한창일 때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과 함께 “여성주의적이고 퀴어적인” 잡지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시, 소설, 수필, 화보 등을 싣는 이 잡지는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글을 받거나 청탁해 지면을 꾸린다. 비정기간행물로, 현재는 ‘축제’라는 주제의 3호를 준비하고 있다.

‘페미니즘 시각예술 매거진’을 표방한 <소문자 에프>(2016년 3월 창간)는 디자인 전공자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졌다. 편집자 이미희씨는 “페미니즘 담론이 확산되는 시기에 디자인 전공자로서 이 물결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다양한 페미니즘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잡지 제호도 하나의 ‘주의’로서 ‘대문자 에프(F)’ 페미니즘이 아닌, 개인 일상의 페미니즘을 뜻하는 ‘소문자 에프(f)’ 페미니즘을 상징한다.

<무비 페미니즘> 텀블벅 화면 갈무리
<무비 페미니즘> 텀블벅 화면 갈무리
이달 말이나 내달 초 창간호를 낼 예정인 <무비 페미니즘>은 여성 캐릭터가 서사의 중심에 있는 영화들을 소개한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영화 속 여성 캐릭터와 작품을 분석하고, 여성을 기능적으로만 소비하지 않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 잉태와 생존에 도움 준 ‘펀딩’ 20~30대가 주축이 돼 만드는 이 독립출판잡지들은 대부분 창간 전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잡지 기획을 알렸다. 선후원금을 받고 잡지를 발간하고 배송하는 형식이다. 후원금의 10%를 수수료로 내는 이런 방식은 홍보가 쉽고, 후원금 액수에 따라 ‘굿즈’를 달리 주는 등 여러 선택지를 후원자들에게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선주문만큼 만드니 재고 부담도 적다.

<사심>
<사심>
<소문자 에프>는 텀블벅에서 한달 만에 1천만원을 모아 첫 책을 냈다. 2015년 10월 ‘미러링 잡지’를 표방하며 창간한 잡지 <사심>도 1~3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후원금을 모았고, 4~5호는 텀블벅 펀딩으로 제작을 진행했다. 여성을 납치해 차 트렁크에 감금한 듯한 표지로 논란이 된 남성잡지 <맥심>에 분노한 여성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나 이야기하다 창간까지 하게 된 이 잡지는 초반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차 트렁크에 앉은 여성이 <맥심>을 찢는 표지의 창간호는 당시 끓어오르는 분노만큼 “거친 욕설”로 채웠다. 창간호부터 잡지 발간에 참여해온 편집위원 메르시(활동명·29, 직장인)는 “처음엔 여성폭력이나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 중심이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좀더 진지하게 섹슈얼리티, 전쟁 성폭력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들은 다섯권의 잡지를 냈고, 현재 6호를 준비중이다.

크라우드펀딩은 페미니즘 잡지 창간을 위한 ‘연대 기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잡지의 수명을 늘리는 데도 필수적이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매호 잡지를 발간해온 <계간 홀로>는 짐송(이진송) 편집장이 2013년 2월14일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혼자 창간한 ‘전방위·무정형·비연애인구 전용 잡지’다. “‘여자 나이 25세 크리스마스트리(케이크)’라는 말을 듣고 빡쳐서 창간했다.”(10호 ‘계간 홀로 늬우스’ 중) 시즌이 지나면 값이 뚝 떨어지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나 트리에 여성을 빗대는 말에 반발해 잡지를 내기 시작했다는 그는 매번 기획과 편집, 원고 청탁과 원고 수급, 발송 등을 혼자 해왔다. 크라우드펀딩에 실패한 적도 있지만 지난해 가을 9호부터는 꾸준히 후원금이 늘고 있다. 그는 “‘바위치기’에서 계란을 맡고 있지만 메추리알에서 왕란 정도로 진화한 느낌이라 기뻐요”(10호 ‘발행인의 편지’ 중)라고 밝혔다.

<계간 홀로>
<계간 홀로>
그밖에도 정확하게 ‘페미니즘 잡지’라고 칭하긴 힘들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독특한 시도를 선보이는 여성 독립잡지들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되고 있다. 2014년 5월 천준아씨가 창간한 잡지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이하 <노처녀>)은 ‘노처녀’를 위한 종합문화매거진 형식. ‘결혼적령기’를 지난 미혼 여성을 가리키는 경멸의 표현인 ‘노처녀’라는 ‘멸칭’을 굳이 제호로 쓴 데서, 비하의 의미를 되받아치는 언어 전복과 유희를 발견할 수 있다. <노처녀>는 4호에서 ‘노처녀’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기획을 마련했다. 준비중인 5호는 사랑에 대한 유명한 심리학 실험을 다룰 계획이다.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
■ 지속가능성은 글쎄…‘이프’ 재설립 “좋아서” “필요해서” “빡쳐서” 잡지를 직접 만들었고, 일반 독자들의 지지와 후원 덕에 잡지는 그럭저럭 만들어내왔지만 페미니즘 잡지가 지금처럼 ‘성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본업’이 아니다 보니 한계에 부딪치기도 한다. <사심>은 지금 준비중인 6호가 마지막권이다. 편집위원 메르시는 “페미니스트로서 계속 살아가겠지만 생업과 병행하는 것이 힘들어 그만두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최근 <이프> 팟캐스트에 출연해 선생님들께 잘하고 있다는 격려와 칭찬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사심> 역시 <이프>가 그랬듯 ‘폐간’이 아닌 ‘완간’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호까지 발행한 <소문자 에프>의 3호 발간일도 아직은 미정이다. 대신 이 잡지는 오는 5월, 여러 단체와 함께 페미니즘 페스티벌 ‘페밋 2017’을 준비중이다. <소문자 에프> 편집자 지혜원씨는 “앞으로 ‘소문자 에프’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과 퀴어 관련 문화 플랫폼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구상이 있어 잡지를 계속 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소녀문학> 이하림 편집장은 “잡지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내고 싶다”며 “어느 순간 우리가 멈춰도 우리 시도는 어딘가에 남을 것이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척박한 출판시장에서 기존 잡지들도 수명이 짧아지는 시대에 전문 출판인이 아닌 이들이 만드는 페미니즘 잡지의 생명력을 기약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조박선영 <이프> 전 온라인팀장(창간 20주년 기념책 편집장)은 “<이프>는 여성학을 공부하거나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던 언론·학계·문화계 다방면의 페미니스트들이 안정적인 기반에서 잡지를 시작한 반면, 요즘 잡지들은 20~30대가 커뮤니티에서 공감대를 형성해 만드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잡지를 만들면서 페미니즘 논의를 어떻게 더 키울 것인지 방법을 모르거나 제작비 확보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있는 잡지들은 여성주의 활동을 지원하는 재단 등에서 사회적인 지원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이프>는 ‘창간 20주년 기념책’(5월 말 출간 예정)을 준비중이다. 페미니스트 삶의 고백을 담은 글을 실을 이번 책에서는 전 편집장들의 글과 함께 최근 페미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며 활발하게 활동중인 10~20대와 왕성하게 운동을 이끌었던 40~50대 ‘왕언니’들의 글도 다수 게재할 예정이다. 조박 편집장은 “책 출간을 위해 지난해 폐업 신고했던 <이프> 출판사도 다시 설립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미영 구둘래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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