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비채(2016) 최근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위원이 저출산 대책 보고서에서 고소득, 고학력 여성을 저혼인 요소로 꼽으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혼인율을, 그리하여 출산율을 높이려면 스펙에 불이익을 주어 교육 기간을 줄이고, 여성이 ‘하향선택’을 하도록 은밀히 유도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작년 말 행정자치부가 대한민국 출산지도에서 지자체별 가임기 여성인구 숫자를 표기해서 논란이 된 지 두달여 만의 일이다. 인구감소는 사회에 위험 요소이고 출생률을 높일 대책은 필요하지만, 이를 여성만의 문제인 양 임신과 출산에 집중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심지어 저출산이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출산이 그에 참여한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옥타비아 버틀러의 과학 소설 <블러드 차일드>를 권한다. 작년에 국내 출간된 이 단편집의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는 한 소년에게 닥친 임신의 이야기이다. 태양계 너머까지 간 인류는 어떤 행성에 정착한다. 이곳에는 지성 생명체인 원주민 틀릭이 산다. 체절이 있는 여러개의 수족이 있어서 인간 시각으로는 곤충과 유사한 틀릭들은 인간인 테란과 거주 계약을 맺는다. 테란은 틀릭에게 가족 내 남자아이를 엔틀릭이라는 숙주로 주고, 틀릭은 자신들의 알을 엔틀릭이 된 남자아이에게 착상한다. 그리하여 남자아이는 다른 존재의 알을 자기 몸으로 낳아야 한다. 이 소설의 설정이 기괴하다고 여겨지는가? 하지만 이는 임신을 결심한 인간 여성이 겪는 일반적인 경험의 은유이다. 소설은 인간 소년인 간과 그의 틀릭인 트가토이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어느날 밤, 간은 다른 테란의 출생 과정을 목격하고 만다. “절개”를 통해 유충을 낳는 테란의 모습을 보고 간은 겁에 질린다. 간은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주하고 싶다. 이지적인 상상력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소설은 남성 임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또한 다른 두 존재 간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작품 뒤에 붙은 후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블러드 차일드’에서 중요한 부분은 소년에게 임신의 의무가 환경적, 사회적으로 주어졌더라도 파트너인 트가토이는 간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둘의 관계에서는 임신의 결정은 소년의 손에 맡겨졌다. 작가가 단언했듯이 이 소설은 노예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노예와 억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려면 누구나 몸과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인생의 사건을 자유 의지와 애정에 의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저출산 관련 정책 제안들이 반복적으로 분노를 사는 이유는 분명하다. 여성을 출산을 위한 숙주로만 보기 때문에.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결정하거나 파트너와의 관계를 꾸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런 결정을 도와주려 하기보다는 그저 강요하고 조종하려 하기 때문에. 저기 먼 행성의 다른 생명체조차 그들을 찾아온 외계인 인류를 존중하는데, 그들은 같은 동료 인류인 여성에게 그만큼의 존중심도 보이지 않는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비채(2016) 최근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위원이 저출산 대책 보고서에서 고소득, 고학력 여성을 저혼인 요소로 꼽으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혼인율을, 그리하여 출산율을 높이려면 스펙에 불이익을 주어 교육 기간을 줄이고, 여성이 ‘하향선택’을 하도록 은밀히 유도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작년 말 행정자치부가 대한민국 출산지도에서 지자체별 가임기 여성인구 숫자를 표기해서 논란이 된 지 두달여 만의 일이다. 인구감소는 사회에 위험 요소이고 출생률을 높일 대책은 필요하지만, 이를 여성만의 문제인 양 임신과 출산에 집중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심지어 저출산이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출산이 그에 참여한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옥타비아 버틀러의 과학 소설 <블러드 차일드>를 권한다. 작년에 국내 출간된 이 단편집의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는 한 소년에게 닥친 임신의 이야기이다. 태양계 너머까지 간 인류는 어떤 행성에 정착한다. 이곳에는 지성 생명체인 원주민 틀릭이 산다. 체절이 있는 여러개의 수족이 있어서 인간 시각으로는 곤충과 유사한 틀릭들은 인간인 테란과 거주 계약을 맺는다. 테란은 틀릭에게 가족 내 남자아이를 엔틀릭이라는 숙주로 주고, 틀릭은 자신들의 알을 엔틀릭이 된 남자아이에게 착상한다. 그리하여 남자아이는 다른 존재의 알을 자기 몸으로 낳아야 한다. 이 소설의 설정이 기괴하다고 여겨지는가? 하지만 이는 임신을 결심한 인간 여성이 겪는 일반적인 경험의 은유이다. 소설은 인간 소년인 간과 그의 틀릭인 트가토이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어느날 밤, 간은 다른 테란의 출생 과정을 목격하고 만다. “절개”를 통해 유충을 낳는 테란의 모습을 보고 간은 겁에 질린다. 간은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주하고 싶다. 이지적인 상상력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소설은 남성 임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또한 다른 두 존재 간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작품 뒤에 붙은 후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블러드 차일드’에서 중요한 부분은 소년에게 임신의 의무가 환경적, 사회적으로 주어졌더라도 파트너인 트가토이는 간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둘의 관계에서는 임신의 결정은 소년의 손에 맡겨졌다. 작가가 단언했듯이 이 소설은 노예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노예와 억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려면 누구나 몸과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인생의 사건을 자유 의지와 애정에 의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저출산 관련 정책 제안들이 반복적으로 분노를 사는 이유는 분명하다. 여성을 출산을 위한 숙주로만 보기 때문에.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결정하거나 파트너와의 관계를 꾸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런 결정을 도와주려 하기보다는 그저 강요하고 조종하려 하기 때문에. 저기 먼 행성의 다른 생명체조차 그들을 찾아온 외계인 인류를 존중하는데, 그들은 같은 동료 인류인 여성에게 그만큼의 존중심도 보이지 않는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