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1901년이면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이다. <매천야록>을 읽다가 이 시기 몇몇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황현은 이 시기 매관(賣官)의 풍조가 갑오개혁 이전보다 심해졌다고 지적한다. 그는 벼슬의 가격도 소상히 밝혀 놓았다.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 아주 좋은 수령 자리는 5만 냥을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의 친척이라도, 아무리 왕이 믿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도 돈을 내지 않으면 벼슬을 얻을 수가 없었다.
대원군의 처남 민겸호는 민영환의 아버지다. 민영환은 고종과 내외종간이다. 가까와도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이다. 민영환은 자신의 외삼촌 서상욱을 군수를 시켜 달라고 오랫동안 고종에게 부탁했다. 하루는 고종은 “네 외숙이 아직 고을살이 하나 못했단 말이냐?”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잊었다. 곧 임명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서상욱은 곧 광양군수에 임명되었다.
민영환이 집으로 돌아가 고종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오늘 상께서 외숙을 군수에 임명하실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자, 그의 어머니는 실소하며 “무슨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누? 그러고도 네가 척리(戚里)란 말이냐? 언제 임금이 그냥 벼슬을 준 적이 있더냐? 내가 벌써 5만 냥을 바쳤단다” 하는 것이었다.
고종이 벼슬을 팔아먹는 사례는 <매천야록>에 흔하게 보인다. 윤용선이 의정이 된 것은 손자 윤덕영이 30만 냥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전라남도 관찰사 조종필이 약속했던 8만 냥을 바치지 못하자 사람을 바꾸어 윤웅렬을 그 자리에 대신 임명했다. 부자 윤웅렬은 당연히 8만 냥을 내었을 것이다.
고종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돈이었다. 김종한이 안렴사로 나가서 일을 대충대충 하고 돌아오자, 고종은 “김종한이 삼수갑산에서 몇 년을 살고 싶은 모양이로구만” 하고 슬쩍 멀리 귀양을 보내겠다고 말을 흘렸다. 김종한은 제꺽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고 집과 땅을 팔아서 수만 냥을 바쳤다. 흐뭇해진 고종은 김종한을 함경북도 관찰사에 임명했다.
관찰사나 군수로 나가는 자가 제 돈을 바칠 리 만무하다. 임지에 도착하면 왕에게 바친 돈을 벌충하기 마련이었다. 결국 세금을 중간에서 횡령했고 그 결과 국가의 재정이 텅 비게 되었다. 공금 횡령을 할 경우 서리는 1만 냥, 군수는 4만 냥, 관찰사는 5만 냥이면 교형에 처한다고 법을 만들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애초 지키자고 만든 법이 아니었고 임금부터 지키지 않았으니 말이다.
관찰사와 군수 등이 세금을 털어먹어도 백성을 쥐어짜도, 그래서 국고가 텅텅 비고 백성의 삶이 구렁텅이에 빠져도 고종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나라 재정이 파탄이 나건 말건 제 주머니만 채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랬다. 탁지부의 재정이 부족해서 관료들의 봉급을 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내장원(內藏院, 왕실의 재산 관리하는 곳)의 돈을 가져다 썼다. 재정 부족에 시달리는데도 고종은 탁지부에서 빌려간 돈을 내놓으라고 닦달이었다. 이런 인간이었으니 급기야 나라가 식민지가 되어도 덕수궁에서 이태왕 전하가 되어 제 목숨 누릴 대로 다 누리다 죽었던 것이다.
나라를 제 소유물로 여기고 관직을 태연히 팔아먹던 고종에게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 없었다. 오늘 이 나라의 대통령과 그를 비호하는 세력들은 어떤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