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오픈예일코스’ 이언 샤피로 교수 강연 갈무리 사진.
정치의 도덕적 기초-예일대학 최고의 명강의 오픈예일코스
이언 샤피로 지음, 노승영 옮김/문학동네·1만5000원
‘우리가 정부에 충성을 다해야 할 때는 언제이고, 거역해야 할 때는 언제인가?’
첫 문장부터 단도직입적이다. 부패한 정치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진 이때, 눈에 쏙 들어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정치의 도덕적 기초>는 다양한 사상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살피는 책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정치철학자 이언 샤피로 예일대학교 정치학 교수가 자신의 대학 강연을 토대로 글을 썼다.
책은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 등 사상가들이 벌여온 치열한 논쟁을 되짚으면서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먼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강조한 제러미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정부의 정당성이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 고전 공리주의는 개인 권리에 무관심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존 스튜어트 밀은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상황은, 오직 타인에게 가해지는 위해를 막기 위해 필요할 때뿐이라는 ‘위해 원칙’을 제시한다. 하지만 밀 역시 “위해가 발생했을 때 정부가 이를 최소화할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거나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 공리라는 관점에서 정부의 억압적 정책을 막아 세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 지난 2월4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연 14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2월 탄핵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어떨까. 마르크스주의는 착취 개념을 기준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판단하지만 누가 착취를 판단하고 측정할 것인지 등 기준이 오락가락한다. 샤피로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부분에서 일관성이 없었다고 설명하면서 “민주주의 절차에 진지하게 주목한 적이 없으면서 그들의 유토피아 세상에서는 민주주의 절차가 불필요해진다고 언급한 것이 전부”라고 지적한다.
사회계약론은 ‘합의’ 개념과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평등한 부의 분배를 중시한 존 롤스의 ‘정의론’에 입각한 사상이다. 사회계약론자들은 정치 권력이 국민의 합의를 저버리면 국민은 그릇된 권력에 저항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롤스는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로 ‘중첩적 합의’ 개념을 제시했다. “동의에 필요한 논리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 결과에 동의하는” 정치적인 접근법을 취하여 국가가 특정한 견해를 선택하고 승인할 때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불이익을 입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이상적인 논리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 예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의 적절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중첩적 합의를 이루지 못해 여전히 논쟁이 뜨거운 낙태 문제를 들 수 있다.
샤피로 교수는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이 형성되는 데는 계몽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서 “비록 이들 사상이 포괄적인 정치적 원칙으로는 실패했지만 정치적 정당성의 근원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런 면에서 근현대 정치사상이 크게 ‘초기 계몽주의-반계몽주의-성숙한 계몽주의’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보는 그는 계몽주의의 핵심 가치인 ‘진리 추구’와 ‘개인 권리’를 가장 잘 구현한 정치사상이 민주주의라고 봤다.
민주주의자들은 정부 결정에 ‘영향을 받는 이해당사자’들이 의사결정을 압박하고, 그들에게 반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정부가 정당하다고 본다. 샤피로 교수는 “지배권을 최소화하여 발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현재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적 정치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박는다.
강원 원주시 중고생 200여명이 2월 9일 저녁 원주 단계동 장미공원에 모여 '민주주의 수호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는 또 있다. 민주주의가 부정과 부패를 폭로하는 민주적 권력 경쟁 메커니즘을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패한 절대 권력자들로 인해 쉼 없이 흔들려온 민주주의가 숱한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남는 건 정권을 언제든지 교체하고 대체할 수 있도록 제도가 보장하고 있어서다. 여의도 정치꾼들이 광장의 촛불들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될 터다. 샤피로 교수는 “민주주의가 권력독점을 치료하는 중요한 해독제”라고 마무리한다.
책은 샤피로 교수의 수십편의 강연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그의 육성 강연을 들어보고 싶다면 예일대 지식공유 프로젝트인 ‘오픈예일코스’에서 무료로 들어볼 수 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