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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나아가는 선택

등록 2017-02-02 19:39수정 2017-02-02 19:51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엘리(2016)

테드 창의 에스에프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2013년에 언어학적 전제가 있는 <바벨-17>(새뮤얼 딜레이니, 현대문학)에 대한 칼럼을 썼을 때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비공식적이지만 신간만 소개한다는 원칙이 있는 이 지면에서 이제 와 이 책에 대한 글을 새삼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록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의 설정을 가져온 영화 <컨택트>가 지금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1998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20년 후에도 여전히 울림이 있는 “내 인생의 이야기” 중 하나가 될 줄 그때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현재에 있으므로 미래를 모르는 것, 이처럼 시간적 인과에 따른 인식만이 가능한 인간의 한계가 ‘네 인생의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언어학자 루이즈가 화자인 이 단편에는 두가지 서술 형식이 교차한다. 하나는 정체 모를 외계 우주선이 지구 위에 나타난 사건을 말하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루이즈가 딸을 2인칭으로 부르며 전하는 ‘네 인생의 이야기’이다. 외계인들은 일곱 개의 다리를 지닌 지적 생명체로, 연구팀은 헵타포드라고 부른다. 물리학자인 제리와 함께 헵타포드의 지적 체계를 탐구하는 임무를 맡은 루이즈는 소통을 시도하여 그들에게는 발화언어와 문자언어가 별개 체계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인류와 일정 부분 유사하게 선형적으로 발화하는 구어와 달리, 문어는 획의 방향과 굵기, 굴곡 등 각각의 문장 요소를 상징하는 형태가 하나로 융합된 비선형적 어의문자이다. 즉, 헵타포드들은 이미 문장을 시작할 때 끝을 알고 있으며 모든 성분을 일시에 결합하여 하나의 표기로 써내려간다.

책 안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사피어-워프 가설이다.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저민 리 워프의 이름을 딴 이 가설의 강력한 형태에 따르면 언어는 인간의 사고체계를 결정한다. 사건을 순차적으로 표현하는 인간과 동시적으로 인식하는 헵타포드는 세계관이 다르다. 빛이 물에 닿으면 굴절한다는 것이 인간의 논리라면, 목적지까지 최단경로를 찾아가기 위해 굴절한다는 것은 헵타포드의 논리이다.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며, 자신의 사고 체계가 변화하는 경험을 한다. 이제 새 언어를 얻은 루이즈는 헵타포드처럼 시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신과 상상력은 하나라고 했던 시인 윌러스 스티븐스의 말처럼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종교적으로 아름다워진다. 루이즈는 “너”의 인생에, “나”의 인생에 마련된 비극을 보았지만, 그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엄있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빛처럼 앞에 놓인 삶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우리 인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이 미래를 모른다 말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 궁극의 목적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인생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 가슴 미어지는 슬픔이, 모든 것의 끝인 죽음이 온다는 것을 알지만, 또한 함께 나누는 농담, 가슴 떨리는 환희, 비극으로도 지울 수 없는 애정도 함께 온다는 것을 보았기에.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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