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황금가지(2016) 역사소설은 역설적인 장르이다. 실제 사건을 소설이라는 허구의 틀 안에서 재배열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작가의 선택을 제한한다. 치밀한 조사로 사실을 충실히 재현해야 하지만 또한 어떤 방법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공백을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그 간극에서 작가는 현실에 얼마나 개입해야 할지 고민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HHhH>는 역사소설가의 이중구속과 즐거움, 무력감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가슴 아프게 그려낸 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을 천착해야 할 의무와 자신만의 관점으로 과거 인물들의 감정을 되살려야 하는 창작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가 쓰는 주제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SS 첩보부와 게슈타포의 수장이자 체코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고자 했던 “유인원 작전”이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은 그 작전에 참여했던 체코 레지스탕스 낙하산 특공대 소속의 두 청년이다. 슬로바키아인 요제프 가브치크와 체코인 얀 쿠비시. 소설은 2008년에 책을 쓰는 나와 1942년에 일어난 암살 사건의 배경을 오간다. 작가는 사건 당사자들이 남긴 회고록, 행정 문서, 밀란 쿤데라와 조너선 리텔 등 역사소설의 대가들이 쓴 작품들을 참조하며 어떻게 유인원 작전을 기록해야 할지를 고심한다. 여기에 교차하는 것이 그 결과인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이다. 한편에는 히틀러의 나치 정부에서 SS의 최고 지도자 히믈러, 그리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하이드리히가 있다. 다른 편에는 짓밟힌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이들이 있다. 작가는 이런 소설의 형식을 “인프라 소설”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실화와 가상의 서사를 작가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인 <HHhH>는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 불린다(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의 약자이다. 유대인 대학살을 실행한 하이드리히의 별명이다. H는 히틀러, 히믈러,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약자이기도 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부상과 암살 사건을 통해 나치 독일의 야욕과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의 잔학성, 무도한 학살을 그리려 한다. 그리고 기록에 남은 레지스탕스들과 기록이 담지 못한 수많은 희생자와 저항자들의 존재를 재생한다. 작가는 역사소설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다. “기억은 당사자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기억을 통해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위로받을 수도 있다.”(238쪽) 유인원 작전의 결말은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안다.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역사를 돌릴 수 없음을, 전지전능한 소설가의 힘을 써서 용감했던 이들을 구할 수 없음을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치른 희생이 의미 없지 않았다고,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바꿔놓았다고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소설가의 특권일 것이다. 현재의 우리가 <HHhH>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희망도 여기에 있다. 설사 지금은 우리의 작은 저항이 무엇도 바꾸어놓지 못하고 좌절한 듯 보일지라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이렇게 바라게도 된다. 지금 우리의 싸움은 후에 기억하는 이들을 마음 아프게 할 결말로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황금가지(2016) 역사소설은 역설적인 장르이다. 실제 사건을 소설이라는 허구의 틀 안에서 재배열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작가의 선택을 제한한다. 치밀한 조사로 사실을 충실히 재현해야 하지만 또한 어떤 방법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공백을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그 간극에서 작가는 현실에 얼마나 개입해야 할지 고민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HHhH>는 역사소설가의 이중구속과 즐거움, 무력감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가슴 아프게 그려낸 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을 천착해야 할 의무와 자신만의 관점으로 과거 인물들의 감정을 되살려야 하는 창작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가 쓰는 주제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SS 첩보부와 게슈타포의 수장이자 체코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고자 했던 “유인원 작전”이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은 그 작전에 참여했던 체코 레지스탕스 낙하산 특공대 소속의 두 청년이다. 슬로바키아인 요제프 가브치크와 체코인 얀 쿠비시. 소설은 2008년에 책을 쓰는 나와 1942년에 일어난 암살 사건의 배경을 오간다. 작가는 사건 당사자들이 남긴 회고록, 행정 문서, 밀란 쿤데라와 조너선 리텔 등 역사소설의 대가들이 쓴 작품들을 참조하며 어떻게 유인원 작전을 기록해야 할지를 고심한다. 여기에 교차하는 것이 그 결과인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이다. 한편에는 히틀러의 나치 정부에서 SS의 최고 지도자 히믈러, 그리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하이드리히가 있다. 다른 편에는 짓밟힌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이들이 있다. 작가는 이런 소설의 형식을 “인프라 소설”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실화와 가상의 서사를 작가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인 <HHhH>는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 불린다(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의 약자이다. 유대인 대학살을 실행한 하이드리히의 별명이다. H는 히틀러, 히믈러,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약자이기도 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부상과 암살 사건을 통해 나치 독일의 야욕과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의 잔학성, 무도한 학살을 그리려 한다. 그리고 기록에 남은 레지스탕스들과 기록이 담지 못한 수많은 희생자와 저항자들의 존재를 재생한다. 작가는 역사소설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다. “기억은 당사자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기억을 통해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위로받을 수도 있다.”(238쪽) 유인원 작전의 결말은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안다.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역사를 돌릴 수 없음을, 전지전능한 소설가의 힘을 써서 용감했던 이들을 구할 수 없음을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치른 희생이 의미 없지 않았다고,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바꿔놓았다고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소설가의 특권일 것이다. 현재의 우리가 <HHhH>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희망도 여기에 있다. 설사 지금은 우리의 작은 저항이 무엇도 바꾸어놓지 못하고 좌절한 듯 보일지라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이렇게 바라게도 된다. 지금 우리의 싸움은 후에 기억하는 이들을 마음 아프게 할 결말로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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