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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연쇄살인과 소외된 소녀의 성장담

등록 2016-11-10 19:15수정 2016-11-10 19:49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더 걸스
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아르테(2016)

1969년의 여름이었다. 히피 문화의 시대, 당시 30대 중반의 음악가 지망생 찰스 맨슨과 그가 이끄는 사이비 종교적 공동체는 캘리포니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맨슨 패밀리’라 불리는, 20대 초반의 여성과 남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맨슨의 지시에 따라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그중에서도 샤론 테이트 살인 사건은 피해자가 유명한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부인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수법의 잔학성으로 대중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체포된 후에 찍힌 사진에서 맨슨 패밀리의 소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환하게 웃고 있다.

에마 클라인의 획기적인 데뷔작 <더 걸스>는 이 맨슨 패밀리에 속한 소녀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정해진 거주지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중년의 여인 이비는 잠시 머물게 된 집에서 어린 연인과 우연히 마주친다. 그리고 그들은 이비가 잊고 싶었던 과거를 끄집어낸다. 열네살의 이비가 열아홉살의 수전을 처음 만났던 1969년의 여름, 부모의 이혼으로 집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소외된 소녀가 느꼈던 갈망이 재생된다.

“나는 남들의 칭찬을 바랐다. 그 목장에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훗날 생각했다. 내가 준비하느라 보낸 모든 시간. 인생이란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기 전에는 그저 대기실에 불과하다고 나에게 가르쳐준 잡지 기사들. 남자애들은 그 시간을 진짜 자기가 되는 데 썼다.”(34쪽)

다른 소녀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수전이 이비를 바라본 순간, 이비는 그들 중 하나, “우리”에 끼기를 바랐다. 작가는 이비가 느낀 갈망의 대상을 공동체의 우두머리인 러셀보다는 수전에게 두면서 소녀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대중문화의 서사들이 숱하게 재구성했던 연쇄 살인범 맨슨 패밀리의 속사정은 세상에서 자신을 받아들여 줄 가족을 찾고 싶었던 한 소녀의 성장 소설로 다시 탄생했다.

<더 걸스>에서는 소녀들이 어떤 사이비 종교적 최면에 사로잡혀 잔학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나 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실제 일어난 사건의 무게를 고려하면, 이런 소설적 처리는 편의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20대 중반의 젊은 작가 클라인이 포착해내려 한 것은 누구나 겪는 불안한 청소년 시절의 마음속 풍경이었다. 자신을 특별히 받아들여 줄 대상에 대한 간절함, 가족과 친구에게 외면당한 외로움, 소녀라는 특정 연령과 성별에 가해지는 학대와 착취에 직면했을 때의 불안과 혼란, 그리고 절박함이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밀한 심리를 파편적으로 포착한 <더 걸스>의 문장들은 몽환적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이 미문들은 연약하며, 어떤 대목에서는 부당하게 여겨진다. 이비가 자기 의지로, 혹은 의지를 벗어나 겪은 사건들은 통과의례로서의 방황이라고 애잔하게 축소할 수 없다. 소녀의 내면에 생긴 틈을 노리고 그리로 스며들어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가하는 사건이 매일 일어나는 세상에서 이 소설의 감상주의는 참극에서 면제받은 자의 자기 연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연민은 어느덧 돌이킬 수 없이 무사한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 우리 모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는 면에서 <더 걸스>는 쓰라린 소설이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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