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높이가 170미터에 이르는 주체사상탑. 그 뒤로 과감한 지붕의 조형미를 뽐내는 청년 중앙회관이 보인다.
기념비적 건축군 대동강 축으로 교차배열
거대한 열병 뒤 주체사상탑 우뚝
거리 성긴 여백엔 구호만 쩌렁
아파트는 큰길 전면에 날개형 배치해
집나서면 바로 전체주의 일원으로
커버스토리/평양 건축물 인상기 떨렸다.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을 짧은 비행임에도 승무원에게 음료수를 청하는 말조차 더듬거릴 정도로 긴장했다. 평양. 나는 그 곳을 향해 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만경대, 주체사상탑, 학생소년궁전 등 참으로 낯선 이름들이 안내 책자에 적혀 있었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언론을 통해 북한과의 교류가 소개되었고 주변에 하나둘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이들도 있었으나, 내 의식의 밑변에서는 아직도 평양이란 적의 흉측한 심장부에 다름 아니었다. 초등학교 애국조회에서부터 예비군 훈련에 이르는 수 십 년 동안 반복되어 주입된 분단 의식은 철책선보다 훨씬 완강하였다. 북이란 철저하게 단절된 금기였고 평양은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불온하였다. 그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여자를 처음 알았던 때의 소름 돋는 흥분과도 같았다. 유년시절을 지배하던 성적 금기를 향해 서툴게 돌진하던 그 때처럼 나는 떨었다. 10월 12, 13일 이틀에 걸친 짧은 방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본부가 주관한 ‘광복60주년 기념 평양문화유적참관단’의 일원이었다. 이 글은 ‘힐끔’ 둘러본 평양의 거리와 건축에 대한 인상기다. 평양은 근대적인 계획도시의 정돈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먼저 안내된 곳은 주체사상탑이었다. 높이 170m가 넘는다는 거대하고 육중한 탑보다도 대동강을 건너 인민대학습당에 이르기까지 똑바로 이어지는 명료한 축이 더욱 놀라운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서쪽의 승리 거리에 위치한 인민대학습당이 이 강력한 축의 시작점이다. 그 앞에는 북한의 주요 행사가 벌어지는 김일성광장이 놓이며 광장의 남북으로 조선역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이 마주한다. 이 축은 강을 건너 동쪽의 3인 군상 조형물과 주체사상탑에 이어지며 그 뒤로도 공공기관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배열된다. 두 영역을 연결하는 선명한 축과 그 사이를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르는 대동강의 유장한 물줄기는 서로 직교하며 극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강을 끼고 양 쪽의 강력한 기념비적 건축군을 잇는 수법은 매우 독창적이다. 서쪽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열병(閱兵) 뒤로 솟구쳐 오른 기념탑의 위용을 보는 것은 분명 소스라치는 충격일 것이다. 이러한 축의 구성이 지닌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자연발생적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사회주의적 도시계획이다. 체육시설 종목 특성 연상케 거리는 깨끗했으나 또 그만큼 비어 있었다. 건물과 건물들 사이에 놓이는 많은 여백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저 비어 있기도 했다. 서울의 도심이 빈틈없이 숱한 건물들로 채워져 조밀한 관계망으로 구성된다면 평양의 도시 구성은 매우 성기었다. 자본주의적 동기는 서울의 거리를 건물과 간판으로 촘촘하게 채운다. 쉴 새 없이 이루어지는 건축행위는 숱한 주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하여 도시는 끝없이 변모되며, 때로 그것은 과밀한 개발이나 공공공간의 축출로 이어져 안타까움을 낳기도 한다. 그에 비하여 평양을 구성해 나가는 사회주의적 의지는 거리를 이루는 낱낱의 공간에까지 세밀하게 개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차이는 건축의 행위 주체가 다름에서 비롯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인민의 일상도 그러하다. 서울에서 시민들의 삶이 숱한 사건들로 채워진 조밀한 시간대를 살고 있다면, 평양을 걷고 있는 인민들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훨씬 느슨한 것처럼 보인다. 삶의 그 성긴 여백을 메우는 것은 구호다. 서울의 거리를 온통 채우고 있는 간판들이 내지르는 소음이 소비의 소란스런 아우성이라면 평양의 건물 옥상마다 올라가 있는, ‘일심으로 옹위하자’에서부터 ‘우리는 행복해요’까지 각종의 구호들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서먹한 선전이었다. 평양은 가히 ‘구호의 도시’라 할만하다. 자부심이거나 혹은 자기최면일 구호들은 성긴 거리의 여백을 메우고 인민의 빈틈을 채운다. 거리를 이루는 건축물들에서는 다양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과감하게 전통적인 기와지붕 형식을 도입한 인민대학습당, 평양대극장과 옥류관, 곡면 지붕이 돋보이는 청년중앙회관, 아치형 트러스가 율동적인 5.1경기장, 山(산)자 꼴로 이루어진 유경호텔 등 조형성이 뛰어난 건축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빙상관, 송구 경기장 등 청춘거리에 늘어선 각종 체육시설들은 종목의 특성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태들로 흥미를 더하였다. 건축가의 의지가 여과없이 반영된 결과다. 건축물 하나를 둘러싸고 건축주, 법규, 시공여건, 인근의 민원 등 숱한 조정을 거쳐야 하는 남쪽에서는 쉽사리 만들어질 수 없는 관념적 형태들이었다. 건축에서 반복적인 모방을 도식과 유사성이라고 배격한 당 지도부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조형을 결정하는 디자인 어법 또한 단일하게 관철되어 매우 명료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이러한 건축물의 형태는 체제에 대한 자긍을 과시하는 기념비와도 같이 읽혀진다. 충고 한껏 높여 화장실문 키2배 이러한 의도에 따라 대부분의 건물 외형도 수직적 구성이 강조된 기하학적 형태가 많다. 공공건물의 내부 공간도 층고를 한껏 높여 압도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급하게 찾아들어간 평양소년학생궁전 화장실의 내부조차 4m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는 화장실 출입문마저도 그 높이가 3미터를 넘어 보였다. 이쪽에서는 로비 등 층고가 높은 공간에서도 화장실의 천장을 낮게 처리하여 내장재 비용 및 냉난방 소모를 줄이고 ‘볼일 보기’에 편안한 공간을 만든다. 놀랍고도 재미있어서 사진기를 꺼내자마자 안내원의 제지소리가 들렸다. 결국은 디지털 카메라에 저장된 파일을 하나씩 검색하여 꼭꼭 지워야 했다. 이대로 북에 억류라도 되는 건 아닌지 화들짝 놀란 가슴은 이어 시작된 공연 내내 콩당거렸다. 분단의 상황에서 나는 아직도 이렇게 소심하다. 광복거리, 창광거리 등지에 늘어선 아파트의 형태도 다채로웠다. 위에서 보아, 중심으로부터 3, 4방향으로 날개가 뻗어나간 형태, 세 개의 원을 결합시킨 형태 등 독특한 조형을 뽐내는 아파트가 서슴없이 들어서 있었다. 이에 비하여 남한의 아파트들은 남향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따라 대부분 동-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 단조로운 배치와 형태를 보이게 된다. 다양한 가치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서울에서, 아파트들이 획일적인 상자모양의 형태들로 오와 열을 맞춰 줄줄이 배치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단일한 사상체계를 추구하는 평양에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형태가 가능하다. 머쓱한 역설이다. 북, 서향에 살아야 하는 인민의 생활이 어떠한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의아한 것은 이러한 아파트들이 대부분 거리 전면에 줄지어 서 있다는 것이었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4-6층의 건물들도 주택 용도가 많다. 서구의 집합주택들도 도심에서는 큰길가에 면하는 경우가 많지만, 북한의 주택들은 매우 의도적으로 도로를 향해 전진 배치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나서 출입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바로 큰길에 나서게 된다. 남한의 주택들은 이와 판이하게 다르다. 대부분의 아파트는 몇 개의 동이 모여 단지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집에서 복도와 계단을 지나 동을 빠져나와도 놀이터나 주차장 사이 길을 거쳐야 단지 출입구에 도달한다. 거기서 다시 한 모퉁이쯤을 돌아 걸으면 비로소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 이른다. 단독주택이나 다세대 주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큰길에서 샛길, 골목으로 들어서야 자신의 집 대문에 이른다. 전통적인 마을에서 보이는 길과 집의 짜임도 이와 같았다. 남, 북의 주택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에는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 개인을 강력하게 사회 속에 통합시키고자 하는 북한에서는 개별주거로부터 도시(거리)에 이르는 간격이 최소화한다. 개인은 자신의 집을 나서면 곧바로 거대한 전체주의적인 사회구조 속에 그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아파트 북·서향살이는 어떨까
양상현/순천향대 건축학과 교수·민족건축인협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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