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갓 꽃을 그렸어
유춘하·유현미 지음
낮은산·1만2000원
“대관절 어떻게 이런 깃털이 생겨났다니? 들여다볼수록 오묘하다.” 청동빛인 듯 진갈빛인 듯 영묘한 기운을 뿜는 ‘공작 깃털눈’의 재발견이다. 평생 농사만 짓던 아흔살의 할아버지는 옹이진 손으로 공작 깃털 세밀화를 그려낸다. 할아버지가 건넨 손바닥 위의 과일조각을 콕콕 쪼아먹던 공작새가 남기고 간 선물은, 할아버지의 시각과 촉각을 깨워 그림으로 탄생했다. 그림 속 보드라운 깃털 가닥가닥이 훨훨 날아 한평생의 가슴속 옹이도 훌훌 풀어헤칠 것만 같다.
“내가 구십이라니, 어마어마하다.” 그림책은 이렇게 운을 떼는데, ‘구십에 그림이라니, 어마어마하다’로 읽힌다. 구십이 된 지난해 1월1일은 할아버지가 그림을 처음 그린 날이다. 셋째딸 현미씨의 성화에 못이겨서다. 이제는 잘 걷지도 못하고 누워서 쉬는 게 제일 편한데다, 그림이라곤 전혀 모르는데 말이다.
<쑥갓 꽃을 그렸어>는 아버지 유춘하씨와 딸 유현미씨의 합작품이다. 아버지의 숨은 재능을 익히 알아본 때문일까? ‘그림 선생님’ 딸과 그림에 입문한 ‘문하생’ 구순 아버지의 그림 수업은 말로 못한 부녀지간의 교감의 장이 된다. 그것은 도화지에 펼친 ‘아버지 인생 인터뷰’이기도 하고, 중년이 된 딸의 어린시절로의 귀환이기도 하다. 연필 드로잉으로 조그맣게 그려진 ‘꼬마 아가씨’는 할아버지와 공놀이도 하고 곁에서 줄넘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습작을 장난스레 들어 보이기도 한다. 현미씨는 “아버지의 말을 모으고 골라 책을 쓰고, 유춘하의 그림(서명과 날짜와 제목이 있는 그림)을 뺀 나머지 그림 전부를 그렸다”고 한다.
첫 그림은 ‘엄마 마음’이라 제목을 단 토끼와 새가 있는 풍경이다. 초등생 같은 천진한 색감의 크레파스 그림이다. “이런 것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원” 했던 할아버지의 6개월 뒤 그림 실력은 장족의 발전을 한다. 주말농장에 갔다가 주워온 자두 두 개를 수채화로 그렸다. 발그레한 자둣빛이 침샘을 돋운다. “농사도 쉽지 않았지만 수채화도 엄두를 못 내겠다”던 할아버지는 슬그머니 군자란 화분을 그려보고는 흡족해 한다. ‘쑥갓 꽃 그리기’란 어려운 숙제를 받은 할아버지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더니 멋지게 작품을 완성한다. “그런데 이상해. 그림이 재미있어.” 그림에 열중하는 할아버지에게서 생의 기운이 뻗어 나온다. 할아버지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도 그리고 파주 반구정에 소풍 가서 풍경화도 그린다. 임진강과 개성공단 송전탑을 그리며, 65년 전 전쟁으로 영영 헤어져버린 황해도 신천 고향의 어머니와 돌쟁이 딸을 생각한다. 어느덧 거실 한 벽을 차지한 할아버지의 그림들, 어느 전시회가 이런 여운을 줄까?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그림 낮은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