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
요즘 ‘책이 없다’고들 합니다. 새 책은 많이 나오지만, 죽비 같은 통찰로 지성계를 뒤흔들 만한 저술·번역이 잘 없다는 것이지요. 대학에서 학자들의 연구실적 평가 때 저술과 번역에 점수를 제대로 주지 않기 때문에 ‘학술지용 논문’만 양산하게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해서, 책이 없다며 볼멘 소리를 하는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입니다. <니체 사전>(이신철 옮김)과 <종말론 사무소>(김항 지음)가 동시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개념어’의 백화점 같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누가 더 빨리 ‘신제품’을 수입해 오는지가 관심의 초점이 되곤 합니다만, 이 책들을 작업한 두 학자들은 그런 유행과는 거리가 멉니다. <니체 사전>으로 ‘현대철학사전’ 전 5권을 11년 만에 모두 우리말로 옮긴 이신철은 그밖에도 탁월한 독일 철학서들을 번역하고 <철학의 시대>(공저)를 쓴 헤겔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그 방대한 학문적 축적과 끈질긴 노력 덕분에 귀한 책들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어 독자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종말론 사무소> 지은이 김항은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 카를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비롯한 여러나라의 중요한 외서들을 번역했고 <말하는 입과 먹는 입> 등을 저술했습니다.
위 두분은 여러 나라의 언어를 독해할 줄 아는 언어 지식의 소유자들이고, 원문을 충실하게 옮기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렇듯 오랜 시간 준비해 인류의 고전을 검토하고 학자들의 지적 계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지독한 연구를 이어가는 모든 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다며 ‘어려운 책’을 너무 쉽게 외면해버리는 독자들이나, ‘신 개념’을 유행처럼 쓰고 금세 잊어버리는 바쁜 지식인들에게도 이 책들은 도움을 줄 듯 한데요. 무엇보다 공부하기 좋은 계절, 가을이지 않습니까.
이유진 책지성팀장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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