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세종 때 우의정으로 은퇴한 유관(柳寬, 1346~1433)은 청렴함으로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출퇴근할 때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녔다. 수레와 말이 있어도 그랬다. 사는 것이 너무나 소박했으니, 입고 있는 것을 보면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누가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꿰어 신고 나갔고, 때로는 호미를 들고 채마밭을 가꾸었다. 이렇게 살았으니 집이란 것도 초가삼간일 뿐이었다. 어느 여름 장마가 져서 연일 비가 왔다. 삼대 같은 빗발이 지붕을 뚫고 쏟아진다. 유관은 우산을 꺼내어 쓰고 빗발을 가리키며 아내에게 한 마디 한다.
“우리는 우산이 있어서 견디지만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이 비를 견딜꼬?”
“우산이 없는 집은 미리 나름대로 방비책을 세워 놓았겠지요.”
<세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는 간단하게 그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다. “집에 있으며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오직 책을 보는 것을 낙으로 알았다. 가난해 쌀독이 자주 비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재산을 불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치관(具致寬, 1406~1470)은 세조 때 영의정까지 올랐는데 엄격하고 공정한 인물로 유명하였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다. 이조의 장관인 이조판서는 인사를 제 마음대로 하고 참판 이하는 끽 소리를 않는 것이 과거의 통례였다. 구치관이 판서가 되자 이런 관행이 말끔히 사라졌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했고, 비록 낮은 관직이라 해도 자기 혼자 결정하는 법이 없었다. 친구라 해서 봐주는 법도 없고,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올릴 벼슬로 올려주지 않았다.
서거정이 참의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잠이 깜빡 들었다. 구치관이 노한 목소리로 “참의는 사람을 뽑을 때 내가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여 참여하지 않는 것인가? 훗날 사람을 잘못 쓴 것이 밝혀지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몰랐다고 할 것인가?” 하고 꾸짖었다. 그는 남의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추천했고 그 결과는 모두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직 공평무사 한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구치관 역시 살림을 돌보지 않아 죽던 날에도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 죽던 날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하니, 이건 정상이 아니다. 굳이 이럴 것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조선시대의 모든 재상이 이랬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유관과 구치관 같은 재상이 있던 세종에서 세조 때까지 조선은 안정된 강한 나라였다. 문화에는 창조성이 넘쳤고 나라 살림도 넉넉했다. 군사력도 있어 여진족을 치고 대마도를 정벌했다.
어떤가. 오늘날 이른바 국가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 이를테면 청와대나 검찰과 같은 곳에 있는 인사들 말이다. 아니면 무슨 장관 자리에 앉기 위해 청문회를 거치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 사람들을 보니 유관과 구치관 같은 분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는 멸종한 인간형임을 절감한다. 게다가 어제, 오늘 대기업에서 미르재단, 케이스포츠재단에 거액의 돈을 가져다 바쳤다는 뉴스를 보니, 오늘날 국가권력을 쥔 자들의 행태를 알 만하다. 청백리나 청렴이란 어휘는 고어사전에서나 찾아봐야 할까.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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