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을 신학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공헌을 했다면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는 의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은 갈레노스가 활동하던 2세기께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의사를 묘사한 조각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여러 철학 두루 섭렵
철인황제 아우렐리우스 주치의 지내
“가장 훌륭한 의사는 또한 철학자”
살아있는 개 신경절단 실험
과학·합리적 방법론은 오늘날도 유효
의학속 사상/③ 의학의 집대성(서양): 갈레노스
고대 서양의학을 대표하는 인물을 두 사람 꼽으라면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를 들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의 윤리강령을 담은 소위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갈레노스를 아는 사람은 현대의 의사들 가운데서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서양의학에 미친 실질적 영향만을 따지고 본다면 갈레노스의 몫이 더욱 크다. 히포크라테스는 서양의학의 정신이라는 측면에서 상징적 의미가 큰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르네상스 시기까지 서양의학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은 갈레노스의 의학 이론이었다. 서양철학의 경우를 비유하자면 히포크라테스가 플라톤이라면 갈레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갈레노스는 기원 후 2세기 소아시아의 도시 페르가몬에서 태어났다. 당시 페르가몬은 지중해 최대의 도시이자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건축가였으며 갈레노스는 아버지를 깊이 존경했다. 갈레노스는 당시의 교육 방식에 따라 어려서부터 철학을 배웠다.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의 학파에는 플라톤의 아카데미 학파,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학파, 스토아 학파, 그리고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었는데 갈레노스는 각 학파를 대표하는 스승들한테 철학을 배웠다. 이러한 철학적 소양은 뒷날 갈레노스가 의학 이론을 체계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갈레노스가 열다섯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특별한 꿈을 꾸게 된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가 꿈에 나타나 갈레노스를 의사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 꿈에 따라 갈레노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학 공부를 시켰고, 갈레노스는 유명한 스승들을 찾아 페르가몬뿐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의학 공부를 했다.
이렇게 실력을 닦은 갈레노스는 당시 서구를 지배하던 제국의 수도 로마로 입성했다. 로마의 의사들과 실력을 겨룬 끝에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갈레노스는 철인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주치의가 되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 갈레노스는 의학과 철학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문학, 철학, 역사, 과학 등 모든 분야를 통틀어 현재까지 희랍어로 가장 많은 글을 남긴 사람이다. 그의 저술은 19세기 초 독일의 의사 퀸이 펴낸 전집으로 1천 쪽짜리 책 스무 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책은 라틴어와 희랍어의 대역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해도 500쪽짜리 책 스무 권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도 갈레노스가 남긴 저술의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저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의학·철학 방대한 저술 남겨
기원 후 4세기 초, 갈레노스가 죽자 별도의 학파를 형성하지 않은 갈레노스의 명성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5세기 이후부터 갈레노스의 의학은 본격적으로 서양의학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워낙 많은 분량의 저술을 남겨 후대의 의사들이 그것을 모두 읽고 공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니 책을 만들고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당 기간 갈레노스 의학의 방대한 내용들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런 요약서들을 통해 갈레노스의 의학이 전해졌다. 이러한 책들은 복잡다단한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해 유통시켰다. 후대에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갈레노스 의학의 독단적 성격은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갈레노스의 저술을 직접 읽어보면 그가 자신의 이론을 독단적으로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반대자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논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갈레노스 의학의 내용 이전에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합리적인 방법에 대한 그의 관심과 노력이다. 갈레노스는 기하학을 의학의 모델로 생각했다. 정의, 공리, 정리 등으로 이루어지는 기하학의 엄밀한 추론방법이야말로 의학이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아카데미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지만 갈레노스는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의학을 연역적 학문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의학에서 경험이 가지는 가치를 충분히 인정했지만 당대에 유행하던 경험론학파처럼 체계적인 방법론에 의거하지 않고 단순 경험의 축적만을 의학의 방법으로 내세우는 입장에 반대했던 것이다. 지금은 단편으로만 존재하지만 그가 <증명에 관하여>란 저술을 한 것만 보더라도 갈레노스가 얼마나 근대적 의미의 과학적 방법론을 추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갈레노스는 <가장 훌륭한 의사는 또한 철학자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당시의 철학은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포괄하는 종합적 학문이었다. 곧 갈레노스는 의학이 과학적 방법을 포함한 종합적 학문의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갈레노스 의학의 내용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적지 않은 의학사 개설서들에서 인체를 이루는 체액의 불균형이 질병을 초래한다는 소위 4체액설이 갈레노스 의학의 전부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갈레노스 의학에서 4체액설이 일정한 구실을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닐 뿐더러 이상 체액의 존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갈레노스는 무엇보다도 정상적 기능의 이상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정상적 기능의 이상을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해부학적 구조의 이상을 들고 있다. 이는 근대의 해부병리학적 질병 개념에 근접하는 것으로 갈레노스 의학의 근대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기하학을 의학 모델로 여겨
또 일부에서는 4체액설이 체액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갈레노스 의학에서 한의학과의 유사성을 찾기도 한다. 물론 균형과 조화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있지만 그 근거가 되는 4체액과 음양오행이 각 의학에서 수행하는 구실을 비교해본다면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 어려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음양오행은 일종의 만능연역체계로 한의학에서는 인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양한 현상을 이 틀에 맞추어 설명하며 경험적 치료의 근거도 이 도식을 통해 정당화시키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음양오행은 한의학의 핵심이 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4체액설은 갈레노스 의학에서 음양오행과 같은 마스터키가 아니다.
갈레노스 의학을 한의학과 갈라놓는 가장 큰 특징은 앞서 언급한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요구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갈레노스는 성대에 분포하여 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는 반회후두신경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 신경의 기능을 알아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다소 잔인하긴 하지만 갈레노스는 살아 있는 개를 묶어놓고 목 부위의 피부를 절개하여 반회후두신경을 노출시켰다.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부를 벗겨 놓았으니 그 개는 죽어라고 짖어댔다. 그 순간 그는 신경을 잘랐다. 개는 여전히 짖어댔지만 짖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반회후두신경의 절단으로 성대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갈레노스는 반회후두신경의 구실을 알아냈다. 오늘날에도 손색없는 과학적 추론 방법이다.
토머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읽으며 그것이 뉴턴의 물리학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속해 있는 것을 느꼈다고 쓴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갈레노스의 저술을 읽으며 그의 의학과 현대의학 사이에서 쿤이 느꼈던 인식론적 단절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그 연속성이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물론 1800여년 전 의학의 내용과 오늘날 의학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새로운 의학 지식이 이전의 지식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는 오늘날 내용의 상이성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에 접근하는 합리적 방법이며 그런 의미에서 갈레노스는 여전히 현대적이다.
기원 후 4세기 초, 갈레노스가 죽자 별도의 학파를 형성하지 않은 갈레노스의 명성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5세기 이후부터 갈레노스의 의학은 본격적으로 서양의학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워낙 많은 분량의 저술을 남겨 후대의 의사들이 그것을 모두 읽고 공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니 책을 만들고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당 기간 갈레노스 의학의 방대한 내용들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런 요약서들을 통해 갈레노스의 의학이 전해졌다. 이러한 책들은 복잡다단한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해 유통시켰다. 후대에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갈레노스 의학의 독단적 성격은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다.
의술의 학문화 이룬 의학계 ‘아리스토텔레스’
여인석/연세대 교수·의학철학 isyeo@yumc.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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