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아기장수 설화’가 있다. 아기를 몹시 바라던 평범한 부모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의 아기가 태어난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힘이 장사인 아들은 곧 관군의 표적이 된다. 부모는 집안에 재앙이 드리울까 아들을 돌로 눌러 죽인다. 아기장수는 곡식과 함께 묻어달라며 부활을 예견하지만 부모는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만다. 관군의 위협에 굴복한 부모로 인해 ‘비상’을 하루 앞두고 아기장수는 스러진다. 새 세상을 향한 꿈은 두번의 죽임을 당한 채 물거품이 된다.
<아기장수의 꿈>은 작가 이청준이 비극적 영웅서사 전승담을 바탕으로 23년 전 쓴 동화다. 1993년 산문집 <광대의 가출>에 실렸던 글이 김세현 화백의 그림과 만나 소장 가치가 높은 그림책으로 재탄생했다. 고려 불화나 조선 민화의 강렬한 전통색을 잇는 ‘진채’의 붓질에서 짙은 슬픔이 배어난다.
“내외는 아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가위로 양쪽 날개를 잘라 버렸습니다.” 작가는 부모에게 죽임당하는 잔혹설정 대신 ‘날개 잘림’으로 꿈이 꺾이는 장면을 그렸다. 아이를 지켜내지 못하는 나약한 부모의 안타까움도 부각시켰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뭔가 불편하고 뒷목이 뻣뻣해진다. 잔혹동화의 서사 때문만은 아니다. 나약한 백성을 겁박하고 속이는 관군의 횡포에 번번이 꺾이는 현실을 마주하는 고통 때문이다. 글쓰기란 “현실의 삶으로부터 영혼을 위로하고 씻기는 과정”이란 이청준 작가의 지론이 읽힌다.
사람들은 그토록 아기장수를 기다려왔음에도 아기장수의 날개를 부러뜨려야 했나? 김 화백은 ‘왜 지금 아기장수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듯 국가권력에 짓밟힌 어두운 현실과 아기장수가 출정을 위해 연마하는 바위 속 세상의 밝은 기운을 또렷이 대별해 그린다. 무책임한 국가의 잘못으로 꿈을 펴지 못한 세월호 아이들이, 녹아내리는 병마 그림에 어리고 산에 정기를 받은 노란 리본의 꿈이 날아다닌다. 장군산, 장군봉, 투구봉, 용마봉, 장수바위 등 전국 방방곡곡에 스며든 아기장수가 뚜벅뚜벅 걸어나오기를 바라듯이.
권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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