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옆집의 영희 씨
정소연 지음/창비 펴냄(2015) 우주여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를 과학자로 만든 건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책이었다. 나사(미국항공우주국)가 이름을 빌려 ‘고더드 우주비행센터’를 만들기도 한 근대 로켓의 아버지 로버트 고더드도 허버트 웰스의 <우주 전쟁> 같은 에스에프(SF·공상과학소설)를 탐독했다. 오늘날 우주여행의 문을 연 사람은 쥘 베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벗어날 즈음, 아이들은 색다른 책으로 관심을 뻗어간다. 오싹오싹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나 지저분하고 역겨운 이야기를 즐긴다. 추리소설이나 과학소설에 관심이 싹트는 것도 이 무렵이다. 치올콥스키, 고더드 같은 과학자도 모두 십대 시절 에스에프를 읽었다. 아마 특목고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들 모두 과학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에스에프의 전통이 약한 편이다. 하지만 최근 과학소설의 개척자인 한낙원을 기리는 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장르에 대한 기대감이 피어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정소연 작가의 에스에프는 상당히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서정적이고 섬세하며 다정하기까지 하다. 에스에프 영화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하나의 장르 안에서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란 얼마나 다양한지 적잖이 놀랄 것이다. 선입견 없이 누구나 읽어볼 만한 단편들이 <옆집의 영희 씨>에 담겨 있다. 작가들이 손꼽는 에스에프를 쓰는 큰 즐거움은 ‘새로운 세계관을 만든다’는 점이다. 독자들의 즐거움도 그렇다. 단편 ‘앨리스와의 티타임’은 이런 구절로 시작된다. “세계는 줄지어 선 작은 방과 같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하나의 긴 공간 같을, 투명한 유리벽으로 나뉜 작고 네모난 방들을 상상해 보라. 보이지 않는 손잡이만 비틀어 열면 들어갈 수 있는 그 방들이 바로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하나의 계다.” 국방부 직원인 앨리스는 ‘다세계연구소’에 근무한다. 업무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곳과 겹쳐 존재하는 다른 세계, 즉 평행우주 속으로 들어가 다른 세계를 훔쳐보고 돌아오는 일이다. 앨리스는 그동안 앤디 워홀이 없는 세계, 파블로 피카소가 무명으로 일생을 마치는 다른 세계를 보았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워홀과 피카소의 빈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채우기 마련이었다. 암의 완치율이 높아지면 또 다른 병으로 똑같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의 삶이란 그저 우연인 걸까. 우리는 이 세계에 살며 그런 공상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선택을 달리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떨까. 작가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과거와 미래, 그로 인한 인간의 운명과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설혹 그 선택 때문에 평범하게 산다 해도 이 삶이 화려한 다른 삶보다 하찮은 것은 아니며,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힘써 살아갈 뿐이다.
작가가 만든 세계에 공명하고, 그 공명으로 잠시나마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를 꿈꾸어 보는 시간 혹은 하찮은 인간사를 비웃고 우주적 고민에 머리를 싸매는 일, 이 모두가 에스에프가 주는 선물이다. 호연지기를 원천봉쇄당한 십대들에게 에스에프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청소년.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정소연 지음/창비 펴냄(2015) 우주여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를 과학자로 만든 건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책이었다. 나사(미국항공우주국)가 이름을 빌려 ‘고더드 우주비행센터’를 만들기도 한 근대 로켓의 아버지 로버트 고더드도 허버트 웰스의 <우주 전쟁> 같은 에스에프(SF·공상과학소설)를 탐독했다. 오늘날 우주여행의 문을 연 사람은 쥘 베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벗어날 즈음, 아이들은 색다른 책으로 관심을 뻗어간다. 오싹오싹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나 지저분하고 역겨운 이야기를 즐긴다. 추리소설이나 과학소설에 관심이 싹트는 것도 이 무렵이다. 치올콥스키, 고더드 같은 과학자도 모두 십대 시절 에스에프를 읽었다. 아마 특목고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들 모두 과학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에스에프의 전통이 약한 편이다. 하지만 최근 과학소설의 개척자인 한낙원을 기리는 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장르에 대한 기대감이 피어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정소연 작가의 에스에프는 상당히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서정적이고 섬세하며 다정하기까지 하다. 에스에프 영화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하나의 장르 안에서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란 얼마나 다양한지 적잖이 놀랄 것이다. 선입견 없이 누구나 읽어볼 만한 단편들이 <옆집의 영희 씨>에 담겨 있다. 작가들이 손꼽는 에스에프를 쓰는 큰 즐거움은 ‘새로운 세계관을 만든다’는 점이다. 독자들의 즐거움도 그렇다. 단편 ‘앨리스와의 티타임’은 이런 구절로 시작된다. “세계는 줄지어 선 작은 방과 같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하나의 긴 공간 같을, 투명한 유리벽으로 나뉜 작고 네모난 방들을 상상해 보라. 보이지 않는 손잡이만 비틀어 열면 들어갈 수 있는 그 방들이 바로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하나의 계다.” 국방부 직원인 앨리스는 ‘다세계연구소’에 근무한다. 업무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곳과 겹쳐 존재하는 다른 세계, 즉 평행우주 속으로 들어가 다른 세계를 훔쳐보고 돌아오는 일이다. 앨리스는 그동안 앤디 워홀이 없는 세계, 파블로 피카소가 무명으로 일생을 마치는 다른 세계를 보았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워홀과 피카소의 빈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채우기 마련이었다. 암의 완치율이 높아지면 또 다른 병으로 똑같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의 삶이란 그저 우연인 걸까. 우리는 이 세계에 살며 그런 공상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선택을 달리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떨까. 작가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과거와 미래, 그로 인한 인간의 운명과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설혹 그 선택 때문에 평범하게 산다 해도 이 삶이 화려한 다른 삶보다 하찮은 것은 아니며,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힘써 살아갈 뿐이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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