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부친 광개토왕을 기려 압록강변의 도읍 국내성(현 지안시)에 세운 광개토왕비는 발견된 지 130여년이 지났지만, 왕의 업적을 새긴 명문을 놓고 지금도 다른 해석들이 난무한다. 특히 왜를 몰아낸 치적을 새긴 신묘년(391년)조 일부분(‘…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의 해석에 대해 한·일 학계는 입씨름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왜가 바다 건너 백잔(백제)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읽으면서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 근거로 삼는 반면, 국내 학계는 백제 정벌 명분으로 왜를 끌어들인 것이라는 등의 반론으로 맞서왔다.
국어사학자인 권인한(54) 성대 국문과 교수는 최근 펴낸 <광개토왕비문 신연구>(박문사)를 통해 비문을 둘러싼 기존 역사 논쟁과는 차별되는 쟁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고대 한반도어, 한문 용법 맥락에서 비문을 살펴보니, 신묘년 조의 경우 백제·신라를 친 주체가 왜라는 일본 쪽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이다. 특히 대만중앙연구원 소장 초창기 원석탁본을 검토하고 지안 현지의 탁본 장인가에 전하는 기록 등을 분석한 끝에 그동안 사라졌다고 봤던 신묘년조 구절의 빈 두 글자(…來渡海破百殘□□新羅…)중 앞자가 ‘東(동)’으로 새롭게 판독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東’자를 넣으면, 이 구절은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동쪽으로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읽히게 된다는 주장이다. 현재 국내 학계는 신묘년조 해석을 놓고 대체로 두갈래 통설을 내놓는다. 왜가 신묘년 침략해오자 (고구려가) 바다 건너 (왜를) 격파하고 신라도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국학자 정인보의 고구려 주어 생략설과, 왜를 주체로 보는 일본 쪽 해석을 수용하되 왕의 업적을 부각시키려고 왜를 끌어들인 수사적 표현이라는 노태돈 서울대 명예교수의 설이다. 권 교수 견해는 노 교수의 설에 좀더 구체적인 국어학적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광개토왕비가 옛 지명·인명·관명 등과 한자어(구)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고대어 보고라는데 초점을 맞춰 국어학 차원의 연구성과를 처음으로 정리했다. 음운사, 문법사, 어휘사 측면을 주로 고찰한 저자는 비 문구에 드러나는 두음법칙의 흔적들, 중국 한자문헌의 전래상황 등을 실증하면서 70년대 나온 후대 비문변조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견해도 내놓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