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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 골목에서 인생을 배웠다

등록 2016-01-28 19:08수정 2016-12-30 10:21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지붕 낮은 집
임정진 지음/푸른숲주니어 펴냄(2004)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본 다음부터인 것 같다. 어릴 때 살던 집과 골목길이 또렷하게 생각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모두들 좁은 골목을 마주 보고 집장수가 지은 단독주택에 모여 살았다. 앵두나무집 할머니, 여인숙집 아저씨, 하숙집 식모언니 등 그 골목에 별의별 사람과 사연이 가득했다. 그들이 떠오르자 그 골목에 살았던 어린 계집아이, 내 모습도 함께 보였다.

이미 어린 시절을 훌쩍 떠나버린 어린이책 작가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두레박을 던지고 추억을 퍼오는 일이다. 시작이야 어린 시절 겪었던 일로부터 비롯되지만 거기에 작가가 지닌 가치관과 태도 등이 반영되어 독립적인 새로운 이야기로 태어난다. 이 과정에서 존 버닝햄이나 로알드 달 같은 작가들이 하듯, 어린이책 작가들은 자기 경험을 지금 어린이의 리듬으로 살려내는 마법을 부린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어른이 된 작가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을 추억하는 방식도 있다. 대개 성인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소설을 쓴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이나 이산하의 <양철북>이 그렇다.

임정진의 <지붕 낮은 집>은 후자에 속하는 소설이다. 도시 변두리에 사는 열세 살 계집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달동네 사람들의 구석구석을 그려냈다. 멀지 않은 과거, 부모 세대가 살았던 1970년대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읽고 나면 추억가루라도 뿌려댄 듯 그 옛날 기억들이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여름방학 내내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오십 권을 읽은 혜진이가 사는 산동네는 조용할 날이 없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며 모여 사는 까닭인지 악다구니가 다반사고 싸움질이 수시로 일어난다. 이제 막 어른들의 세계에 눈 떠가는 혜진이는 이런 이웃 사람의 사연을 하나씩 들려준다. 거기에는 환희전파사 길씨 아저씨의 이야기와 이삿짐 보따리가 똥지게와 닿자 신세타령을 시작한 만수 엄마의 설움과 미제물건 장사를 하다 야반도주를 한 희숙이네 집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이 중에서도 혜진이는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살던 명철이를 위하는 마음이 살뜰하다. 집이 땅속으로 들어가 있는 지붕이 낮은 집에 살던 명철이는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천변 옆 국수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동네에 야학이 들어서자 머리가 길고 얼굴이 하얀 여대생 선생님을 혼자 좋아했다. 몇 달이 지나 더는 야학에 나오지 않는 여대생 선생님의 생일날, 명철이는 선물로 하모니카를 불어주겠다며 대학교를 찾아가겠다고 한다. 이런 명철이에게 혜진이는 “바보 같은 놈, 미친놈, 정신 빠진 놈!”이라고 악을 쓴다. 혜진이가 이사 가는 날, “나중에 크면 성공해서 만나자”고 말했던 명철이를 혜진이는 다시 만났을까.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작가는 그 좁은 동네를 떠나고 난 뒤 그곳에서 맞닥뜨릴 가난이 지겨워 오래도록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한다. 다시는 그 시절로 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조금씩 그곳이 그리워진다고 적고 있다. 작가들이 있는 한, 그들이 우리네 비루한 삶을 기억해주는 한, 우리 모두는 살아 있고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초등 고학년부터.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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