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최영희 지음, 김유대 그림/푸른숲주니어 펴냄(2014)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면 어린이건 어른이건 누가 읽어도 좋다. 종종 어린이·청소년 문학을 선입관을 지닌 채 바라보는 이들에게 늘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어린이문학을 읽을 때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게 있다. 바로 판타지다.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판타지의 세계로 가 버린다. 어린이들은 그 세계로 들고 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데 닳고 닳은 어른에게는 거북살스럽고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았다. 이럴 때 어른 입장에서 바꿔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은 억압된 소망의 은폐된 실현”이라고 했다. 어른들도 현실에서 무언가를 바라고 꿈꾸지만 말하거나 소망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우리는 꿈을 통해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를 실현하고 싶어 한다. 어린이들의 판타지는 이와 비슷하다. 어른들의 꿈처럼 아이들은 좌절된 소망을 판타지를 통해 꿈꾼다. 어른이 밤의 세계라면 아이들은 낮의 백일몽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러기에 뜬금없어 보이지만 실은 판타지의 공간, 상상으로 가는 입구, 변화의 방법이나 조건이 모두 현실에 기반한다. 외국 작가들은 특히 판타지로 들어가는 문에 공을 들인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쓴 클라이브 루이스의 옷장,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의 9와 3/4 정거장처럼 입구가 있다. 하지만 국내 작가들은 현실과 판타지를 경계 없이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최영희의 <슈퍼 깜장봉지>도 그렇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외로움이나 불안에 사로잡혔을 때 상상의 힘으로 현실과 맞선다는 걸 잘 보여준다. 재미나게도 작가의 상상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그건 말하자면 비(B)급 정서다. <슈퍼맨> <엑스파일> 같은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가 작가가 되면 어떻게 상상의 세계를 직조할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런 정서가 은근슬쩍 녹아 있고 바로 이 지점이 작품을 유쾌하게 만든다. 초등학교 3학년 아로는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과다호흡증후군이 생겼다. 아빠가 보고 싶다 싶으면 호흡 조절이 안 된다. 이때는 비닐봉지를 입에 대고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니 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고, 별명도 깜장봉지다. 과다호흡이 찾아오면 아로는 현실을 잊기 위해 영웅이 된 제 모습을 상상했다. 혼자 체육물품 창고에서 놀던 날도 그랬다. 한데 검정 봉지를 입에 대고 들숨과 날숨을 쉬던 아로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벤지 요원, 이 빛을 쪼이게. 이 빛이 자네를 슈퍼 영웅으로 만들어 줄 걸세. 초능력이 생기면 몸도 금방 회복될 거라네.” 이 행성을 도우러 온 ‘엑스’가 봉지를 벤지로 잘못 발음했다고 생각한 아로는 바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마음속에서 “가서 악당을 혼내 줘. 넌 슈퍼 깜장봉지니까” 하는 소리도 듣는다. ‘슈퍼 깜장봉지’가 된 뒤 아로는 달라졌다. 겁날 것도 없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기태를 혼내주고 결투도 벌인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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