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패트리샤 매클라클랜 글, 천유주 그림, 김은영 옮김
풀빛미디어 펴냄(2014) 책이란 읽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나가지 않는다면 그 속내를 좀체 보여주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간혹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나는 죽음 담당이다”로 시작하는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이나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로 운을 떼는 정유정의 <7년의 밤>은 첫 문장만으로도 끝까지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엄마라고 불러도 될까요?> 역시 몇 쪽 읽자마자 끝까지 읽을 가치가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책을 읽는 기쁨은 첫눈에 반한 상대를 알아가는 연애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다. 동화는 패트리샤 매클라클랜이 1985년 발표한 어린이책의 고전으로 미국의 어린이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는 2003년 원제를 살려 <키가 크고 수수한 새라 아줌마>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절판되었던 책은 어찌된 일인지 ‘엄마라도 불러도 될까요?’라는 낯선 제목을 달고 2014년 재출간되었다. 책의 제목이야 출판사의 고유 권한이지만 그래도 이 책은 ‘키가 크고 수수한 새라 아줌마’가 어울린다 싶어 못내 아쉽다. 1900년대 초 미국 중부 캔자스주를 무대로 삼은 <엄마라도 불러도 될까요?>는 로버트 뉴턴 펙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이나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리운 메이 아줌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맞춤한 책이다. 어쩌면 지금 어린이들보다는 동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중장년 세대가 더 공감할 작품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사람들은 자연과 이어져 있었고 동물을 가족처럼 아꼈다. 아이들은 누구나 집안일을 거들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고민은 좀 더 단순하고 선명했다. 가족과 이웃을 의지해 시련에 맞섰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엄마라고 불러도 될까요?>의 애나와 남동생 칼렙 그리고 아버지가 바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다. 엄마가 남동생을 낳다 돌아가신 후 애나는 집안일을 하며 동생을 보살핀다. 동생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엄마를 끝없이 그리워하고,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더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웃도 없는 광활한 초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쓸쓸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가족은 아버지가 신문에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며 긴장에 휩싸인다. ‘키가 크고 수수한’ 새러 아줌마가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마침내 잠시 애나의 집을 방문한다. 애나와 동생은 새러 아줌마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봐 조바심을 낸다. 하루 종일 새러 아줌마를 졸졸 따라다니고, 아줌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뻐했다가 슬퍼했다가를 반복한다. 이야기는 새러 아줌마가 마차 모는 법을 배워 시내에 가는 장면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이들은 아줌마가 엄마가 되어 주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고향의 바닷가를 그리워하던 아줌마가 마차를 타고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불쌍한 애나와 칼렙이 옆에 있다면 손이라도 꼭 잡아주련만 혹은 둘을 끌어안고 함께 울어주고 싶을 만큼 아이들의 소망은 간절하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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