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격투기 선수 출신 요리사 김옥종 씨
김옥종씨
1995년 첫 한국대표 ‘K1 대회’ 출전
첫 라운드에서 KO패로 은퇴 ‘전설’ 어머니와 식당하며 페북에 글쓰기
최근 ‘시와 경계’ 신인 공모에 당선
“영혼 살찌우는 시 요리하고파”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고단한 저녁의 혈 자리를 풀어주는, 가을 끝자락의 햇볕을 모아 한철 시퍼런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절망의 밑동을 잘라내어 그 즙으로 조청을 만들고 끈적끈적한 세월 맛볼 수 있게 만드는 요리, 적어도, 그 계절의 움푹진 골짜기에서 흐르는 향기만이라도 담아서 덖어주고 쪄내고 네 삶 또한 감자처럼 포근히 익혀줄 것이니 때를 기다려 엉겨 붙어주시게나. 전분이 할 수 있는 가지런한 사명감에도 한 번씩 우쭐대고 싶은 날들도 있으니 늙은 호박과의 친분이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갈치인들 어떻고 고등어인들 나무라겠는가. 그저 호박과 어우러져 등짝 시린 이 세월의 무게만큼만 허리 깊숙이 지지고 있다 보면 뒤척이지 않아도 가슴 빨갛게 농익지 않겠나. 기다림의 끝은 이렇듯 촉촉한 가을비처럼 스며드는 맛이었음을 오래 잊고 살지 않겠나.’(당선작 ‘늙은 호박 감자조림’) 일찌기 ‘문학소년’의 감성을 지니고 있던 그가 이처럼 뒤늦게 문학으로 돌아온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 신안군 백일장 같은 데서 곧장 상을 받아오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반응은 늘 시쿤둥했어요. 대신 동생의 우등상만 칭찬하셨죠.” 당선작 가운데 하나인 ‘눈’에 어릴 적 그의 방황이 녹아 있기도 하다. ‘~아주 어린 시절/ 매질에 맨발로 달아나던 그 신작로에도/ 눈꽃은 피어 있었고/ 오일장에 가신 울엄니 떨군 해를 등지고 대실 잔등 너머 핼쑥해진 붕어빵을 사 오실 때도, 가출했다 돌아오던 그 날, 오십 원어치는 항상 허기졌던/ 읍내 피래네 어묵집 앞 도로에도/ 녹아서는 안 되는 기억 몇 개쯤은 포근히 내렸다’ 그의 첫번째 직업은 건축기사였다. 광주의 한 전문대 건축학과를 나와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자신처럼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아이들이 안타까워 킥복싱 체육관도 열어 사범 노릇을 함께 했다. 그러다 주위의 권유로 1995년 일본 도쿄 코라쿠엔홀에서 열린 ‘케이-원 그랑프리 개막전’에 한국 대표로 첫 출전했다. 몸무게 85kg 이상 헤비급 선수 8명이 토너먼트로 붙는 이 대회에서 그는 첫 상대로 일본의 가라테 선수 쯔요시 나가사코를 만나 그만 ‘1회 케이오패’를 당하고 말았다. “워낙 경험도, 준비도 없이 나갔다가 보기 좋게 망신만 당한 거죠. 그날로 선수 은퇴를 하고 도장도 문을 닫았어요. 그런데 잊어버릴 만하면 요즘도 스포츠전문 채널 같은 데서 ‘전설적인 경기 장면’이라며 틀어주나봐요. 참 내ㅋㅋㅋ….” 그뒤 그는 어머니의 식당일을 돕다 ‘칼 쓰는 일’에 빠져 들었다. 어머니는 88년부터 광주에서 ‘아코 식당’이라는 백반집을 하고 있었다. 아코는 맏이인 그의 어릴 적 별명 ‘아기 코끼리’의 준말이란다.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구요, 어느날 단골 손님이 광어 활어를 들고 와서 요리를 해달라기에 회를 떠봤는데 뜻밖에 소질이 있더라구요.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친구들이나 손님들 모습을 보면서 따뜻한 정을 나누는 재미를 느꼈어요.” 한때 민어 전문점을 열어 독립했던 그는 지난해부터는 고향 지명을 딴 ‘지도로’에서 어머니와 동업을 하고 있다. 점심엔 어머니가 순자연식 백반을 팔고, 저녁엔 그가 직접 요리하는 선술집으로 바뀐다. “요리하듯이 시를 쓰고 싶습니다. 칼과 도마로 써온 시편들입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사람들의 몸보다는 영혼을 살찌게 할 시를 쓰고 싶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데도 뽑아주신 것은 더 잘 쓰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당선 소감에서 밝혔듯이, 그는 첫 시집으로 ‘시가 있는 요리책’을 내 볼 참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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