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4일, 정운영 전 <한겨레> 논설위원이 타계했다. 각 신문은 부음기사를 실었다. 인터넷에서는 그의 ‘변절’ 여부를 놓고 작은 논쟁이 일었다. 여러 네티즌의 글 속에 애증이 교차했다. 80년대 강단의 정운영, 90년대 <한겨레>의 정운영, 2000년대 <중앙일보>의 정운영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그가 남긴 흔적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의문 부호로 덮여 있다. 그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그의 삶 가운데 몇 대목을 짚었다. 이 글은 <한겨레> 9월26일치 부음기사의 후속편이다. 완결편은 먼 미래의 일로 돌려둔다.
<한겨레>와 정운영
1999년의 일을 두고 ‘한겨레가 정운영을 내쫓았다’거나 ‘정운영이 돈을 좇아 중앙일보로 옮겼다’는 식의 소문이 이미 꽤 퍼져 있다.
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 2면에는 ‘본사 발령’ 기사가 있다. 대표이사 송건호, 편집인 임재경, 편집이사 권근술, 논설위원 리영희·최일남·김금수·최장집·김종철·신홍범·조영래·정운영 등 9명의 이름이 실렸다. 쟁쟁한 필진이었다. 정운영은 창간 때부터 <한겨레>를 대표한 경제평론가였다.
당시 임재경 편집인과 권근술 이사를 제외한 전원이 비상임 논설위원이었다. ‘비상임’이란 신문사에 매일 출근하는 정규직 임직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이들 대부분은 다른 경제·사회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한겨레 상근 논설위원은 다른 직업을 겸할 수 없다.
외환위기의 충격이 이어진 1999년, 한겨레신문사에서도 긴축경영이 화두였다. 새 경영진이 들어선 99년 초부터 ‘이번 기회에 몇명 남지 않은 비상임위원들을 모두 해촉한다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창간을 함께 했던 이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반기 들어 일부 비상임논설위원들이 스스로 사표를 썼다. 비상임논설위원 가운데 제일 마지막으로 정운영도 사표를 썼다.
<한겨레>의 한 전직 논설위원은 “정 선생을 내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회사 안팎의 여러 복잡한 상황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만 ‘예외’를 적용하기는 힘들었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한 논설위원은 “그러나 그 배경에 정 위원에 대한 사내 일부의 좋지 않은 감정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신문사는 정기적으로 대표이사를 사원들의 직접선거로 뽑아왔다. 민주주의는 종종 소모적인 오해와 편견을 낳는다. 정운영은 신문사 밖은 물론 안에서도 여러모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한겨레신문사를 퇴사한 날은 1999년 12월31일이다. 90년대도 함께 저물었다. 한신대와 정운영 그의 내면에 박힌 상처는 한신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신대는 그의 이름 석 자를 한국에 알린 첫 둥지였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1982년 한신대에 자리 잡았다. 신학대학으로 출발한 이 학교는 당시 종합대학 승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수행·이영훈(현 서울대)·윤소영·강남훈(한신대) 교수 등이 정운영과 함께 한신대 경상학부에 몸담았다.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들이 주도한 한신경제과학연구소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진앙지였다”고 평가했다. 정운영은 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다. 그런 한신대에 대해 정운영은 가끔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민주화운동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그것이다. 86년, 정운영은 다른 교수들과 함께 ‘학내 투쟁’을 벌였다. 신학부 중심의 대학운영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학장 불신임안을 교수회의에서 통과시키려다 불발에 그쳤다. 그는 김수행 교수와 함께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진짜 고민은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86년부터 호헌철폐운동이 본격화됐죠. 한신대 교수들도 적극적이었지요. 비록 학내 문제에서는 서로 갈등했지만, 신학부 선생님들도 대거 동참했습니다. 한신대는 민주화 진영의 중요한 근거지였습니다. 계속 ‘내부에서’ 싸울 경우, 어렵게 뭉친 교수들의 반독재 전선이 흔들릴까 걱정했습니다.” 김수행 교수는 ‘반독재민주화 대오의 단결을 위해’ 두 사람이 스스로 사표를 냈다고 설명했다. 정운영이 대학에서 나오던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뒤이어 여섯달 동안 계속된 거대한 물결 속에서 그는 마땅히 둥지를 틀 곳이 없었다. 가난과 정운영 그는 평생 경제문제와 씨름했다. 글 속에는 한국경제를 담았지만, 실제로는 가정경제를 고민해야 했다. 가산을 탕진한 부친 덕에 그는 가난을 끼고 살았다. 온양에서 태어났지만 대구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외가인 온양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것도 가정 환경 탓이다. 그는 대학원 졸업 뒤 1년 남짓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를 다녔다. 윤소영 교수는 “유학을 준비중이었는데, 결혼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상황이라 생계 해결을 위해 신문사에 잠시 몸담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톨릭 사제들의 도움으로 벨기에 루벵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났다. 대학시절부터 카톨릭 사회운동에 관심을 쏟은 것이 인연이 됐다. 루벵대는 중세 이후 신학의 중심지였고, 근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중심지였다. 짧은 교수시절은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근 20여년 동안 그의 수입원은 <한겨레>의 원고료와 서울대·고려대의 강사료가 전부였다. 그는 1983년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를 거의 다 들어냈다. “원래 기골이 장대했는데 수술 이후 그렇게 마르셨다는군요.” 윤소영 교수의 말이다. 87년엔 허파에 병이 생겨 입원했다. 소설가 조정래씨가 사정을 들려준다. “이런저런 치료비가 계속 들어간거죠. 어렵게 집을 장만한 적이 한두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시 집을 팔았지.” 유족들은 지금 서울 외곽의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고 있다. 대학과 정운영 주변 사람들은 그가 진작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을 전한다. 오랫동안 <한겨레> 비상임논설위원으로 재직한 것도 언젠가 교수로 강단에 돌아갈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많다. 2000년 무렵에 그런 기회가 생겼다. 성공회대가 경제학과를 새로 만들면서 정운영을 교수로 임용할 계획을 세웠다. 신영복 성공회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시 정치경제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학과를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 정 선생에게 교수직을 제안했고, 본인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지만, 그 뒤로 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익명의 한 대학 교수는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성공회대-한신대-상지대가 ‘민주대학 컨소시엄’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신대 일부 교수들이 정 선생의 성공회대 부임을 불편하게 생각한거죠. 결국 이 세 대학의 협력틀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해서 정 선생 임용이 미뤄졌죠.” 이에 대해 신영복 교수는 “전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99년 정운영은 경기대 경제학과 부교수로 임용됐다. 그가 이 자리를 크게 반긴 것 같지는 않다. 경기대 경제학과는 거시·미시·계량 경제학 등 이른바 ‘주류 경제학’ 커리큘럼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기영 경기대 경제학과 교수는 “눈에 두드러지는 행동이나 남에게 부담되는 이야기를 내세우기보다는 화합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다. 강의시간에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학생들간의 토론을 유도하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또다른 동료 교수는 “한번은 경제학설사라는 수업을 듣는 학생이 세 명밖에 없다고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와 정운영 정춘수 전 <중앙일보> 심의실장은 정운영과 입사 동기다. 지난해에 퇴직했다. 생전의 정운영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켰다. “정 선생이 유학을 마친 뒤에도 신문사 동기들과 정기적으로 만났다”고 그 인연을 전했다. “우리가 알기론 한겨레신문사에서 답답한 상황이 돼서 물러날 형편이었다. 마침 사내에 진보성향의 필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인사에 힘을 쓸만한 고위 간부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동기모임 등을 통해 그런 메시지를 전했다.” 정운영은 <중앙일보>에서 사설을 쓰지는 않았다. “신문사도 그렇고 당사자도 그렇고 서로 (사설을) 안쓰는 쪽으로 양해했다. 그래서 정 선생의 심적 부담이 덜했을 것”이라고 정 전 심의실장은 전했다.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2004년 12월8일치 <중앙시평>) ‘반동의 반동은 반동을 부른다’(2004년 7월28일치 <중앙시평>) ‘우수마발이 다 개혁은 아니다’(2004년 10월26일치 <중앙시평>) 등의 글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앙일보> 시절에 쓴 다른 글에서도 ‘냉소’의 흔적이 깊다. 지인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윤소영 교수는 “386세대를 비롯해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대한 서운함이 말년에는 굉장히 깊었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칼럼을 쓴 것은 학문적 판단 외에도 그런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김수행 교수는 “민중, 그리고 민중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를 많이 품은 것 같았다”며 “지금까지 지켰던 신념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왔다”고 말했다. 한 중견 언론인은 “그이가 평생 고통 속에서 민감하고도 치열하게 살았던 것에 대해 감동하지만, <중앙일보>에서 쓴 몇가지 글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영복 교수는 “정 선생이 <중앙일보>에 썼던 글은 그 신문사 상황에서 활자화하기 힘든, 비판적이고 좋은 글이었다. 하나의 글보다는 전체적·거시적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칼럼을 아예 읽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부러 안 읽었지. 실존적 사정 때문에 그 곳에 갔는데, 마음에 안드는 글을 읽으면 내가 괴롭잖아? 그게 우정이 아닐까 싶었어.” 이 모든 기억과 평가에 대해 부인 박양선씨는 입을 다물었다. 박씨는 “돌아가신 분, 편안하게 보내드리자”며 만남을 사양했다. 전화선 너머에서 박씨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 분한테는 한겨레에서 중앙으로 옮긴 게 아주 아주 큰 일이었어요….”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박승화 <한겨레21>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의 한 전직 논설위원은 “정 선생을 내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회사 안팎의 여러 복잡한 상황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만 ‘예외’를 적용하기는 힘들었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한 논설위원은 “그러나 그 배경에 정 위원에 대한 사내 일부의 좋지 않은 감정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신문사는 정기적으로 대표이사를 사원들의 직접선거로 뽑아왔다. 민주주의는 종종 소모적인 오해와 편견을 낳는다. 정운영은 신문사 밖은 물론 안에서도 여러모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한겨레신문사를 퇴사한 날은 1999년 12월31일이다. 90년대도 함께 저물었다. 한신대와 정운영 그의 내면에 박힌 상처는 한신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신대는 그의 이름 석 자를 한국에 알린 첫 둥지였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1982년 한신대에 자리 잡았다. 신학대학으로 출발한 이 학교는 당시 종합대학 승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수행·이영훈(현 서울대)·윤소영·강남훈(한신대) 교수 등이 정운영과 함께 한신대 경상학부에 몸담았다.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들이 주도한 한신경제과학연구소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진앙지였다”고 평가했다. 정운영은 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다. 그런 한신대에 대해 정운영은 가끔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민주화운동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그것이다. 86년, 정운영은 다른 교수들과 함께 ‘학내 투쟁’을 벌였다. 신학부 중심의 대학운영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학장 불신임안을 교수회의에서 통과시키려다 불발에 그쳤다. 그는 김수행 교수와 함께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진짜 고민은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86년부터 호헌철폐운동이 본격화됐죠. 한신대 교수들도 적극적이었지요. 비록 학내 문제에서는 서로 갈등했지만, 신학부 선생님들도 대거 동참했습니다. 한신대는 민주화 진영의 중요한 근거지였습니다. 계속 ‘내부에서’ 싸울 경우, 어렵게 뭉친 교수들의 반독재 전선이 흔들릴까 걱정했습니다.” 김수행 교수는 ‘반독재민주화 대오의 단결을 위해’ 두 사람이 스스로 사표를 냈다고 설명했다. 정운영이 대학에서 나오던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뒤이어 여섯달 동안 계속된 거대한 물결 속에서 그는 마땅히 둥지를 틀 곳이 없었다. 가난과 정운영 그는 평생 경제문제와 씨름했다. 글 속에는 한국경제를 담았지만, 실제로는 가정경제를 고민해야 했다. 가산을 탕진한 부친 덕에 그는 가난을 끼고 살았다. 온양에서 태어났지만 대구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외가인 온양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것도 가정 환경 탓이다. 그는 대학원 졸업 뒤 1년 남짓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를 다녔다. 윤소영 교수는 “유학을 준비중이었는데, 결혼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상황이라 생계 해결을 위해 신문사에 잠시 몸담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톨릭 사제들의 도움으로 벨기에 루벵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났다. 대학시절부터 카톨릭 사회운동에 관심을 쏟은 것이 인연이 됐다. 루벵대는 중세 이후 신학의 중심지였고, 근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중심지였다. 짧은 교수시절은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근 20여년 동안 그의 수입원은 <한겨레>의 원고료와 서울대·고려대의 강사료가 전부였다. 그는 1983년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를 거의 다 들어냈다. “원래 기골이 장대했는데 수술 이후 그렇게 마르셨다는군요.” 윤소영 교수의 말이다. 87년엔 허파에 병이 생겨 입원했다. 소설가 조정래씨가 사정을 들려준다. “이런저런 치료비가 계속 들어간거죠. 어렵게 집을 장만한 적이 한두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시 집을 팔았지.” 유족들은 지금 서울 외곽의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고 있다. 대학과 정운영 주변 사람들은 그가 진작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을 전한다. 오랫동안 <한겨레> 비상임논설위원으로 재직한 것도 언젠가 교수로 강단에 돌아갈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많다. 2000년 무렵에 그런 기회가 생겼다. 성공회대가 경제학과를 새로 만들면서 정운영을 교수로 임용할 계획을 세웠다. 신영복 성공회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시 정치경제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학과를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 정 선생에게 교수직을 제안했고, 본인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지만, 그 뒤로 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익명의 한 대학 교수는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성공회대-한신대-상지대가 ‘민주대학 컨소시엄’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신대 일부 교수들이 정 선생의 성공회대 부임을 불편하게 생각한거죠. 결국 이 세 대학의 협력틀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해서 정 선생 임용이 미뤄졌죠.” 이에 대해 신영복 교수는 “전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99년 정운영은 경기대 경제학과 부교수로 임용됐다. 그가 이 자리를 크게 반긴 것 같지는 않다. 경기대 경제학과는 거시·미시·계량 경제학 등 이른바 ‘주류 경제학’ 커리큘럼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기영 경기대 경제학과 교수는 “눈에 두드러지는 행동이나 남에게 부담되는 이야기를 내세우기보다는 화합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다. 강의시간에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학생들간의 토론을 유도하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또다른 동료 교수는 “한번은 경제학설사라는 수업을 듣는 학생이 세 명밖에 없다고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와 정운영 정춘수 전 <중앙일보> 심의실장은 정운영과 입사 동기다. 지난해에 퇴직했다. 생전의 정운영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켰다. “정 선생이 유학을 마친 뒤에도 신문사 동기들과 정기적으로 만났다”고 그 인연을 전했다. “우리가 알기론 한겨레신문사에서 답답한 상황이 돼서 물러날 형편이었다. 마침 사내에 진보성향의 필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인사에 힘을 쓸만한 고위 간부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동기모임 등을 통해 그런 메시지를 전했다.” 정운영은 <중앙일보>에서 사설을 쓰지는 않았다. “신문사도 그렇고 당사자도 그렇고 서로 (사설을) 안쓰는 쪽으로 양해했다. 그래서 정 선생의 심적 부담이 덜했을 것”이라고 정 전 심의실장은 전했다.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2004년 12월8일치 <중앙시평>) ‘반동의 반동은 반동을 부른다’(2004년 7월28일치 <중앙시평>) ‘우수마발이 다 개혁은 아니다’(2004년 10월26일치 <중앙시평>) 등의 글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앙일보> 시절에 쓴 다른 글에서도 ‘냉소’의 흔적이 깊다. 지인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윤소영 교수는 “386세대를 비롯해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대한 서운함이 말년에는 굉장히 깊었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칼럼을 쓴 것은 학문적 판단 외에도 그런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김수행 교수는 “민중, 그리고 민중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를 많이 품은 것 같았다”며 “지금까지 지켰던 신념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왔다”고 말했다. 한 중견 언론인은 “그이가 평생 고통 속에서 민감하고도 치열하게 살았던 것에 대해 감동하지만, <중앙일보>에서 쓴 몇가지 글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영복 교수는 “정 선생이 <중앙일보>에 썼던 글은 그 신문사 상황에서 활자화하기 힘든, 비판적이고 좋은 글이었다. 하나의 글보다는 전체적·거시적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칼럼을 아예 읽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부러 안 읽었지. 실존적 사정 때문에 그 곳에 갔는데, 마음에 안드는 글을 읽으면 내가 괴롭잖아? 그게 우정이 아닐까 싶었어.” 이 모든 기억과 평가에 대해 부인 박양선씨는 입을 다물었다. 박씨는 “돌아가신 분, 편안하게 보내드리자”며 만남을 사양했다. 전화선 너머에서 박씨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 분한테는 한겨레에서 중앙으로 옮긴 게 아주 아주 큰 일이었어요….”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박승화 <한겨레21>기자 eyeshoot@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