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도청당한 백악관

등록 2005-09-29 18:52수정 2005-10-01 00:21

대통령실의 녹음-린든 비 존슨 편<br>
버지니아대학 밀러센터 정리. 노턴 앤 컴퍼니 펴냄. 2005년 5월
대통령실의 녹음-린든 비 존슨 편
버지니아대학 밀러센터 정리. 노턴 앤 컴퍼니 펴냄. 2005년 5월
74년 닉슨 하야 때까지 전화·회의 모두 몰래 녹음 소련첩자보다 내부 더 불신 대통령의 불안 달래는 도구
바깥세상 책읽기

미국 대통령들이 집무실인 백악관 오벌오피스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대화를 몰래 녹음했던 시기가 있었다. 194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부터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까지다.

처음엔 집무실 대화 녹음에서 시작해 전화통화 녹음으로 확대됐고, 나중엔 오벌오피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녹음됐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집무실과 회의실 등에 11개 이상의 도청기를 설치했다. 도청 사실은 극비에 속하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의 와중에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대통령실의 녹음-린든 비 존슨 편>은 존슨 대통령 시절의 녹음내용을 활자로 풀어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을 펴낸 버지니아대학 밀러센터는 각 대통령 사설도서관 등에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입수해 전부 녹취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존슨은 전화통화만 녹음을 했다. 시기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암살 직후인 1963년 11월부터 1964년 1월까지다. 그래도 내용이 방대해, 책으로만 세권 분량이고 총 페이지 수는 2500여쪽에 이른다. 일반 대중을 위한 독서용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역사의 한 시기를 대통령의 육성자료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아마 다른 책들에 인용·재인용되며 앞으로 많은 이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권력의 한 단면이 가감없이 대통령의 육성 그대로 담겨져 있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지난 5월 출간됐을 때 <뉴욕타임스>가 ‘북 섹션’의 머릿기사로 한면을 털어 이 책을 소개한 이유도 이런 데 있을 것이다.

또하나 존슨의 집권기록이 요즘 관심을 끄는 데엔 그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둘 다 텍사스 출신으로, 휴가를 텍사스 개인목장에서 보냈다. 부시 대통령의 영어발음이 자주 놀림감이 되는데, 존슨 역시 사적인 전화에선 텍사스 사투리를 썼다. 가령 흑인을 비하해서 부르는 ‘니그로(Negro)’를 존슨은 전화통화에선 ‘니그라(Nigra)’라고 말했다.

언론을 불신했다는 점에서 존슨과 부시는 비슷하다. 그러나 부시가 아예 신문을 읽지 않는 데 비해, 존슨은 매일 아침 여러 신문을 읽었고 언론사 간부들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잡지가 최고야”라는 식으로 다독이는 노회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보가 언론에 자꾸 새나가자 존슨이 백악관 참모에게 이렇게 불평하는 대목도 나온다. “국무부 친구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언론에 흘린다. 내가 소련 첩자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밖에서 보기엔 정부 고위관리들이 한마음이고 잘 짜여져 움직일 것 같지만, 막상 안을 들여다 보면 의회의 야당보다 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정책방향에선 존슨과 부시는 정반대다. 존슨은 흑백차별을 철폐하는 시민권리법안을 입법했고, 미국 이민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도입한 이도 존슨이다. 존슨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이념을 그대로 쫓아, “정부란 사회의 소외받은 이들을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신념에 투철했다고 <뉴욕타임스>는 평했다.

그러나 미국민들 사이에 존슨은 그리 인기있는 대통령이 아니다.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로 대통령직에 오른 그는 늘 케네디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갑작스런 암살로 ‘영원한 이상주의자’가 된 케네디와 달리, 존슨에겐 지극히 현실적이고 노회한 정치인이란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존슨은 대통령 재임 내내 ‘케네디 컴플렉스’에 시달렸고, 이런 심경을 반영하는 부분이 전화통화 녹음에 간간이 담겨 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이 펴낸, 역대 대통령의 평점을 매긴 <대통령의 리더십>에 그는 17위에 올라, 18위인 케네디보다 약간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이게 존슨에겐 그나마 위안이 될 듯 싶다.

백악관 집무실의 녹음에 관심이 있지만 이 책이 너무 방대해 버겁다고 느끼면, 1999년 출간된 윌리엄 도일의 <오벌오피스 내부>(Inside the oval office)를 한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이 책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절부터 닉슨 시절까지 집무실의 녹음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대표적인 녹음내용들과 함께 재밌게 설명하고 있다. 도일은 왜 대통령들이 집무실 대화를 스스로 녹음했는지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미국 대통령들은 자신을 방어할 증거를 확보하려 했다. 녹음기는 통치를 위한 한 수단이었다”고 밝혔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