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정의에 대하여>
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정의에 대하여
테드 제닝스 지음, 박성훈 옮김
그린비·2만7000원
바울을 생각한다-정의에 대하여
테드 제닝스 지음, 박성훈 옮김
그린비·2만7000원
‘사도 바울’은 서양 철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존재 가운데 하나다. 바울은 오랫동안 보수적이고 교조적인 기독교 교리의 상징처럼 여겨져왔다. 그러나 야코프 타우베스와 같은 신학자,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슬라보이 지제크와 같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이 바울로부터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사상의 자원들을 발견해냈고, 바울을 새롭게 풀이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활발하다.
성서를 근거로 성소수자 담론을 펴는 ‘퀴어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테드 제닝스도 이 대열에 뛰어들었다.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바울의 텍스트를 섞어 읽어가며, ‘정의’라는 주제에 담긴 정치신학적 의미를 새롭게 새기는 책이다.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환대에 대하여> 같은 데리다의 여러 텍스트들을 불러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와 연결짓고 의미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데리다는 니체, 벤냐민 같은 사상가들과 다르게 바울에 대해 직접적인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은이는 데리다의 ‘해체’ 사유와 ‘정의’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해체’라는 작업을 통해 서구 전통의 일자적 진리에 균열을 내려고 시도했던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자체로 법의 바깥 또는 너머에 있는 정의는 해체 가능한 것이 아니다. (…) 해체는 정의다.” ‘법 너머에 있는 정의’는 바울에게도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율법에 의한 메시아의 처형’이란 역설적인 사건을 두고, “정의로움의 인정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며 정의가 법(율법)의 너머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두 사람은 법과 정의가 긴장관계에 있으면서도 결국은 분리할 수 없다는 점에도 같은 인식을 보였다. 정의를 사유하려면 정의를 법에서 떼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법의 본질에는 필연적인 폭력이 있지만, 법 자체를 폐기한다면 정의 또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의가 법 너머에 있다면, 정의의 가능성 역시 교환과 순환 같은 법질서의 바깥에서 찾아야 할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데리다와 바울의 사유로부터 ‘선물(또는 은혜)로서의 정의’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정의는 인간의 행위나 어떤 자격 등에 따라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보상이나 분배가 아니며, 도리어 그런 교환과 순환의 법칙에서 벗어나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 또는 은혜와 같은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법 너머의 정의’ 역시 법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기존의 법 바깥에서 메시아를 따르는 이들이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하는 정치적인 과제가 주어진다. 지은이는 타자에게 내 집의 문을 활짝 여는 ‘환대’와 ‘용서’(데리다), ‘메시아적 환영’(바울)과 같은 사유로부터 법 바깥의 정의를 이뤄낼 자원들을 모색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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