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자본주의는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사회로 변형됐다고 말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그문트 바우만·시트랄리 로비로사마
드라조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1만7500원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89) 영국 리즈대 명예교수는 요즘 한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외국 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대 초에 처음 소개됐고 2008년께부터 속도가 붙더니, 지난해에는 7권의 책이 번역돼 나왔다. 그의 대표 개념인 ‘유동성’을 뼈대로 하는 <유동하는 근대>(한국어판 <액체 근대>), <유동하는 사랑>(<리퀴드 러브>) 같은 유동성 시리즈가 대부분 출간됐고, 지난해에는 그의 대표작이지만 번역이 늦어졌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도 나왔다. 그 사이사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같은 소품들도 출간돼 한국 독자들을 찾았다.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는 영국에서 2009년에 나온 대담집이다. 대담자는 시트랄리 로비로사마드라조라는 멕시코 출신 여성 사회학자다. 출간 시기에서 짐작되듯 대담은 2008년 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논의로 시작된다. 바우만은 금융위기의 원인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적 축적’에 관한 연구와 자신의 ‘유동성’ 개념을 가지고 분석한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는 ‘처녀지’가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팽창과 착취에 열려 있는 한에서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숙주’가 고갈되면서 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봤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힘은 앞서 착취한 종이 지상에서 희소해지고 멸종될 때마다 새로운 종류의 숙주를 발견해내는 놀랍도록 기발한 재주에 있음을 알게 됐다.” 이번 금융위기는 자본주의의 종말의 신호가 아니다. “단지 최근의 방목지가 고갈됐음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최근의 방목지는 무엇이었을까? 바우만은 현대 자본주의는 이윤이 노동자의 착취에서 나오는 ‘생산자 사회’에서 이윤이 소비주의적 욕망의 착취에서 나오는 ‘소비자 사회’로 변형됐다고 말해왔다. 생산자들의 ‘견고한 현대’ 사회로부터 소비자들의 ‘유동적인 현대’ 사회로의 이행이다. “비즈니스의 목적은 수요의 충족을 방지하고, 충족을 갈망하는 더 많은 수요와 더 많은 잠재적 고객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이는 대출을 해주는 금융회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이상적인 대출자’는 융자금을 결코 다 갚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금융위기는 은행의 실패의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은행의 탁월한 성공의 과실이다. 즉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다수 사람들을 채무자라는 인종으로 변형시키는데서 거둔 성공 말이다.” 신용카드와 빚은 소비의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게 해준다. 바우만의 금융위기 주제 대담
소비적 욕망 부추겨 이윤 짜내
은행은 다수를 채무자로 옭매
금융위기 벼랑 끝에 멈췄을 뿐 이전처럼 이번에도 국가는 이 새로운 방목지의 설립을 지원했다. 미국에서 ‘서브프라임’의 도입은 빌 클린턴 정부가 주도한 것이었다. “국가와 시장이라는 두 마리 고래는 종종 다툴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하에서 둘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는 공생관계다.” 그리고 “(금융위기는) ‘납세자들’의 돈을 마구 투입함으로써 벼랑 끝에 멈추어 섰다. … 우리는 소비와 신용으로 추동되는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정상화’는 나쁜, 항상 잠재적으로 위험천만한 방식들로 돌아가려는 전조다.” 5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는 여전히 흔들바위처럼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하면서도 여전히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태다. 두 사람은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들로 논의를 확대해나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린 30년 동안 ‘사회적 국가’ 내지 ‘복지국가’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유동적 현대’, ‘소비자사회’에서는 왜 더는 불가능한지를 논한다. 생산자 사회에서는 노동력이나 전투력이 필요할 때 대열에 합류시킬 ‘신체 건강한 남자’의 수가 중요했고, 사회적 국가는 복지제도를 통해 이를 유지하는 구실을 했다. 하지만 소비자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투자는 ‘합리적 투자’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잠재적 자산이라기보다는 영구적 부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적 잉여’ ‘인간 쓰레기’로 취급당한다. 자본과 상품 교역의 지구화 앞에서, 즉 시장권력의 지구화 앞에서 무력해진 개별 국가와 정부 문제도 주요하게 다뤄진다. 비록 이에 대한 바우만의 대안이 코즈모폴리턴적 엔지오들이 추동하는 ‘사회적 지구’라는 대목에서 다소 힘이 빠지긴 하지만 말이다. 카를 슈미트의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 홀로코스트, 성과 인구, 종교와 신, 유전자 조작과 과학기술, 사랑과 미래세대 같은 주제도 다뤄진다. 대담자가 바우만의 주요 저작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그가 다뤄온 여러 주제를 묻고 있어 바우만의 사상을 일별할 수 있는 입문서로 적당할 듯하다. 대담자는 바우만에 비하면 ‘풋내기 학자’지만,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대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관조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는, 냉소의 기운마저 풍기는 이 노학자를 상대로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퍼붓는다. ‘냉정’과 ‘열정’을 각기 대변하는 듯한 이 둘의 긴장관계는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당신의 질문은 아주 인상적이고, 여러모로 시사적이며 자극적입니다. … 당신의 모든 ‘신문’에 대답할 수 있다고는…기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종교에 대한 질문을 받은 뒤 건네는 바우만의 말에서는 이 후배 학자에 대한 불편함이 살짝 느껴지기도 한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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