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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덟 여성 삶 통해 본 압축성장기 한국의 속살

등록 2014-03-23 19:23

미국의 인류학자인 낸시 에이블먼은 <사회이동과 계급, 그 멜로드라마>에서 “계급은 인간이라는 실로 짜인 관계와 귀속의식으로 만들어지고, 이야기 자체는 하나의 중요한 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낸시 에이블먼 제공
미국의 인류학자인 낸시 에이블먼은 <사회이동과 계급, 그 멜로드라마>에서 “계급은 인간이라는 실로 짜인 관계와 귀속의식으로 만들어지고, 이야기 자체는 하나의 중요한 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낸시 에이블먼 제공
사회이동과 계급, 그 멜로드라마
낸시 에이블먼 지음, 강신표·박찬희 옮김
일조각·2만5000원

낸시 에이블먼 미국 일리노이대학(어배나섐페인 캠퍼스) 인류학과 교수는 자신의 주된 연구대상을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으로 삼아온 학자다. 1980년대 전북 고창 소작농 농민운동에 대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에도 <친밀한 우주: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과 분리의 문제>, <대안은 없다?: 한국 교육의 실험> 등 여러 편의 한국 관련 연구서를 펴냈다. 주로 사회이동, 가족, 계급, 성, 교육, 이주 등을 연구주제로 삼는다. <사회이동과 계급, 그 멜로드라마>는 2003년 미국에서 나온 <사회이동의 멜로드라마: 현대 한국의 여성, 이야기 그리고 계급>을 번역한 책으로, 한국의 ‘압축 성장기’에 대한 문화기술지적 연구다.

이를 위해 에이블먼 교수는 1990년대 초~2000년대 초 서울을 수차례 방문해 50대 후반~60대 초반(1990년대 초 기준)인 여성 여덟명을 인터뷰했다. 각 여성과 최소 여덟번 이상 면담했고, 이 중 몇은 열번 이상 만났다. 이들은 1930~40년대에 출생한 세대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급속하게 진행된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을 겪으며 성인이 됐다.

이들 여덟명은 소득수준, 교육수준 등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세탁소 할머니’는 남편의 세탁소 일을 돕고 바느질로 돈을 벌어 두 아들을 교사로 키워냈다. ‘혜민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손녀인 혜민을 돌봐주고 있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30대 초반에 과부가 된 뒤 혼자서 청소일을 하며 일곱 자녀를 길러냈다. ‘영화 아주머니’는 영화와 드라마 보기를 좋아하며, 두 딸이 19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미연 엄마’는 부동산 투자로 상당한 돈을 벌어들인 소위 ‘복부인’이지만, 외도를 일삼는 남편 때문에 상처를 받으며, 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에 시달린다. ‘교육엄마’ 역시 부동산 투자로 상당한 돈을 벌었으며, 자식들을 모두 ‘명문대’에 보냈다. 교수 부인인 ‘박 여사’는 신혼 시절 남편의 공부를 위해 해외에서 몇년을 보냈고, 자녀도 외국에 유학 보냈다. ‘쌍둥이 엄마’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명문대 졸업생과 결혼해 부자동네의 대형 아파트에 사는 전업주부다.

에이블먼 교수는 이들이 자신들의 삶과 가족에 대해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계급변동, 서사(narrative), 가족, 젠더, 정체성 등의 개념을 통해 분석하고 재구성한다.

특히 ‘사회이동’, 즉 계급과 신분의 상향이동 내지 하향이동은 책 전체를 관통하며 지은이가 강조하는 개념 중 하나다. 에이블먼 교수는 계급에 대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나 베버주의 해석을 거부하고 “관계, 사회적 공간, 네트워크 같은 개념에 초점을 맞추는 서사 이론가들”과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을 끌어들인다. 계급을 이해관계나 직업에만 기초해 보지 않고, ‘서사적 정체성’의 관점을 따르는데, 즉 계급은 “유년기와 일생을 통해 세대간의 혹독한 시련을 거쳐 발전해 간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계급이동에서 가족이 결정적인 구성요소라고 보고, 가족적 맥락을 검토한다. 이는 지은이가 남성이 아닌 여성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외국인 여성 인류학자의 분석
급속한 사회변화 생생한 목격담
계급이동에 가족이 결정적 요소

‘교육엄마’가 들려준 제 여동생의 ‘운명’은 이런 지은이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에피소드다. 교육엄마는 자신이 누리는 ‘중산층’ 생활을 “주식과 부동산의 여유 있는 수익으로 생활하고, 헬스클럽 회원권을 소유하고, 해외여행을 즐길 정도의 시간과 돈이 있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남해안 바닷가 한 도시에서 조개 행상을 하고 있었다. 여동생은 젊은 시절 남편이 경찰관을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으로 장사를 해보려고 바닷가 마을로 떠났다. 하지만 도중에 여동생이 시골 버스 정거장에서 퇴직금이 든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면서, 그 정거장은 두 사람에게 ‘가난으로 떠나는 간이역’이 되고 말았다. 얼마 안 가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고 여동생은 버림받았다.

교육엄마는 이 이야기를 하다 돌연 여동생의 불행한 처지가 ‘남자 같은 성격’ 탓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동생의 성격이, 해방 후 월북한 남편과 생이별한 어머니의 ‘욕심’ 때문에 형성됐다고 생각했다. “교육엄마는 어머니의 강한 성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겉으로는 ‘네, 네’ 하면서 속으로 앞날을 준비해간 반면에, 여동생은 어머니와 사사건건 맞서며 자랐다.” 하지만 결국 여동생은 어머니의 욕망을 따르고 마는 결과를 맞았는데, “경찰관 사윗감이 양반 출신이라는 것만 따진 어머니의 ‘무식한 욕심’ 때문”에 여동생이 ‘밑바닥 직업’인 경찰관에게 시집을 ‘잘못’ 가게” 됐기 때문이다. 에이블먼 교수는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개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위치 변화의 고통을 겪었는지를 멜로드라마(감정과 줄거리의 과잉이 특징인 연극·문학·영화의 장르)적 차원에서 보게 해준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여기에 소개된 여성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며 “이들의 공통점은 정말로 힘들게 살아온 인생이었다는 것, 지각변동이 일어난 세계의 생생한 목격자였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이론가가 되었”고 “이 책의 모든 여성은 한국 근대성의 현기증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한국인인 우리에게 그리 새롭지는 않다. 주변의 어머니, 할머니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무심코 넘기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외국인 여성 인류학자의 눈을 통해 본 해석이 병행되면서 자기 객관화와 이를 통한 성찰의 경험을 제공해준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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