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이학사 식구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무실에 모였다. 왼쪽부터 강동권 대표, 박동수 영업부장, 임양희 편집부 과장, 김지연 편집부 대리, 손주영 디자이너.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작지만 강한 출판사 <19> 이학사
새로운 인식이 담긴 글감 발굴
철학 등 인문사회 분야 주종
“책 기본법 제정 출판 지원을”
새로운 인식이 담긴 글감 발굴
철학 등 인문사회 분야 주종
“책 기본법 제정 출판 지원을”
형이상자위지도,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표현이다. 형상 이전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상 이후의 것을 기라고 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메타피지카>를 동양에서 번역한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이 이 구절에서 유래했다. 이학사는 형이상학, 형이하학에서 ‘이’와 ‘학’을 따와 만든 이름이다. 언뜻 ‘이학’(理學)이라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이학’(而學)이다.
“처음에는 형이상학 책도 만들고, 형이하학 책도 만들자는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형이상학 쪽 책만 내고 있네요.”
19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이학사 사무실에서 만난 강동권(55) 대표는 농담을 섞어 이학사라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했다. 이름에 잘 쓰지 않는 ‘이’(而)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또 있다. 이 한자의 기능은 말을 잇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고’, ‘그러나’처럼 여러 뜻으로 쓸 수 있다.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좋았습니다.” 강 대표가 이학사가 지향하는 가치를 설명하며 장 폴 사르트르의 “인간은 인간의 미래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는 까닭도 비슷하다. “인간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는 열려 있는 것,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이학사는 ‘새로운 인식이 담긴 책’, ‘열린 세상을 꿈꾸는 책’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에 나왔던 내용, 지금 사회의 통념과 똑같은 내용을 또 책으로 내는 것은 의미가 없죠.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가 <세기>에서 20세기를 에릭 홉스봄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처럼 ‘다른 인식’이 담겨야죠.”
1996년 시작한 이학사는 18년 동안 200종 가까운 책을 냈다. 최근에는 두 달에 3종, 1년에 18종 정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철학, 정치사상, 신화학, 종교학, 미학, 사회학 등 인문사회 분야 교양서와 학술서가 대부분이다.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이학사가 어려운 책을 내는 출판사가 돼버렸더군요. 상황이 힘들다 보니 출판사들이 아무래도 쉽고 팔리는 책 쪽으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이학사 책은 많이 팔린 책들이 2만부가 채 안 된다. 지금은 ‘스타 필자’가 된 강신주씨의 초창기 저작 <철학 삶을 만나다>, 국내에 ‘네그리 열풍’을 불러일으킨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 존 롤스의 고전적 저작 <정의론> 등이 1만부를 넘겼다. 질 들뢰즈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도 꽤 호응을 얻었고, 번역에 7년이 걸린 대작인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전 3권)는 ‘대박’이 터지진 않았지만, 지금도 꾸준히 나간다. 최근 나온 <세기>(알랭 바디우), <처음 읽는 헌법>(조유진), <독일미학전통>(카이 함머마이스터) 등도 모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올 상반기 중으로는 <메타폴리티크>(알랭 바디우), <일본군위안부>(윤명숙),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바 일루즈), <요가>(미르체아 엘리아데), <철학의 근본 물음>(마르틴 하이데거)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학사 이야기를 하면서 ‘아나키즘’을 빼놓을 수 없다. 강 대표는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이다. “대학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나키즘 쪽으로도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방법론 측면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은 형제와 같으니까요.” 이학사에서는 <아나키즘 이야기>(박홍규),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김성국 외), <한국 아나키즘 100년>(구승회) 등 10여권의 아나키즘 관련 책을 냈다. “좀 더 내고 싶은데 못하고 있죠. 아나키즘 책이 잘 팔리는 편은 아니니까요.”
이학사는 예상되듯 흑자를 내는 출판사가 아니다. 강 대표는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면서 인문정신을 잃지 않고 좋은 책을 내려고 노력하는 4명의 출판사 식구들과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하는 남편을 20년 가까이 응원해준 아내 덕분에 계속 책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에서는 책을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등과 같은 선상에 있는 문화의 한 분야, 엔분의 일(1/N)로 보고 정책을 짭니다. 하지만 책은 단순히 한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를 받쳐주는 토대입니다. 책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 언어의 기본입니다. ‘책 기본법’을 제정해서 출판에 대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절실합니다. 지금 상태로 가면 책은 고사하지 않겠습니까? 책이 없어지면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사유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강 대표는 “지금 이학사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절박함은 출판인들이라면 모두 이해할 듯싶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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