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관을 배경으로 함께한 선교회 활동가들과 여성노동자들. 왼쪽 첫째가 조지송 목사, 둘째가 스티븐 라벤더 선교사, 오른쪽 끝이 인명진 목사.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제공
선교로 출발 노동운동 발전
활동가와 노동자 믿음의 연대
용공 조작 총공세에 조직 와해
활동가와 노동자 믿음의 연대
용공 조작 총공세에 조직 와해
장숙경 지음
선인·3만3000원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한다’는 표어 아닌 표어가 있었다. 앞의 도산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줄임말, 뒤의 도산은 기업이 망한다는 뜻이다.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을 고사시키기 위해 당시 정권과 보수세력, 언론 등에서 퍼뜨린 선동적 표현이다. 심지어 30여년이 지난 최근에도 한 신문은 “도산이 들어가는 중소기업체는 거의 도산했다. … 도산은 사라졌는데 요즘에 와서는 ‘희망버스’가 돌아다니며 절망을 만들고 있다”는 사설을 썼다. 1970년대 노동운동의 중요한 주체였던 도시산업선교회(산업선교회)의 활동을 1950년대 초창기부터 1980년대 쇠퇴기까지 살펴보며, 그 기원과 구체 활동내용, 역사적 의미, 쇠퇴의 원인까지 종합적으로 정리·분석한 연구서가 출간됐다. 장숙경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해 펴낸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이다. 산업선교회 활동을 노동운동의 한 부분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라는 또다른 맥락 안에 위치지우며 분석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산업선교회는 한국 개신교가 노동자들을 ‘선교’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50년대 중반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산업전도’ 활동에서 시작한 것으로, 애초 목적은 당시 급속히 증가하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런 교세 확장 운동이 어떻게 노동운동으로 변화했을까? 지은이는 이 변화 과정, 주로 목사들이던 산업선교 활동가들이 노동자들의 ‘현실’에 눈떠가는 과정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본다. 대표적 활동가였던 조지송 목사는 “노동자들에게는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상 치료비가 더 중요하고, 제때에 받지 못한 체불임금, 퇴직금, 해고, 구타 등이 당면한 문제라는 사실이 가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조승혁 목사 역시 “아침은 꽁보리밥에 점심은 생각도 못하고 저녁은 밀수제비를 먹는 상황에서 교회는 무슨 교회인가”고 생각한다. 당시 서울 영등포의 편직업계 종업원의 대부분은 10대 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은 하루 15~17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며 법정 유급휴일, 각종 수당도 받지 못했다. 산업선교 활동가들이 내린 결론은 ‘노동조합 운동’이었다. 이들은 소그룹활동, 교육, 상담 등을 통해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경영진과 맞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의 활동은 70년대에 절정에 달했고, 이에 따라 정권의 탄압도 거세졌다. 이 연구에서 눈에 띄는 점은 개신교 내 보수세력이 산업선교회 활동을 막기 위해 정권과 어떻게 ‘협력’하고 때로는 정권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서술한 부분이다. ‘정권과 산업선교회의 대립’으로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었지만, 실제 산업선교회를 압박한 주체는 정권과 개신교 보수세력의 ‘동맹’이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산업선교회 활동가들이 노동자 편에 설수록 각 산업선교회가 속한 교단 쪽 시선은 냉담해졌다. 박정희 정권과 ‘유착’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나가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개신교는 5·16쿠데타가 나자 “우리는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방종한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기독공보> 1960년 5월29일치)며 즉각 지지를 표했다. ‘정교 유착의 꽃’은 대통령조찬기도회였다. 미국과 한국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는 이 독특한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 공산당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종교계에 침투하려 하고 있다”(1974년 5월)고 경고하며, 산업선교회의 노동운동을 견제해달라는 ‘지시’를 교계에 내렸다. 그 대가로 정권은 서울 정동에 한국대학생선교회 회관을 세워주었고,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엑스플로 74’ 같은 초대형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통금 해제, 버스노선 변경 등의 파격 지원을 해주었다. 박 정권(그리고 뒤이은 전두환 정권)과 개신교 보수세력의 탄압의 주요 도구는 ‘산업선교회는 빨갱이다’는 선전, 즉 용공화 작업이었다. <한국기독교와 공산주의>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같은 소책자들이 교회와 기업체에 대규모로 뿌려졌다.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속한 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기업주 출신 장로들은 그들을 “방화·살인을 합리화하는 성직자군”이라고 매도했다. 이 교단은 1984년 총회에서 산업선교회를 사실상 해체시켰다. 감리교 소속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역시 80년대 초 활동가의 구속으로 거의 마비상태였는데도 “지역 교회들로부터 산업선교로 인해 자신들의 목회활동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항의를 받았다”. 산업선교회 노동운동은 80년대 이후 노동운동과 비교해 체계적인 이념이나 대규모 조직 등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이 한사람의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던 시절, “산업선교회 활동가들은 형제처럼 친절하고, 노동자들을 지극히 섬겨, 노동자 입장에서는 산업선교 회관이 내 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실무자들을 깊이 신뢰하게 됐고, 노동자들 간에는 목숨 같은 동료애를 형성할 수 있었다”. 장숙경 교수는 2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계도 있었지만 산업선교회 운동은 다시는 재현되기 힘들 정도의 높은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폭압적인 정권에 맞서 그 정도의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뢰와 연대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공주의, 성장주의를 매개로 결합한 보수정치권·개신교·기업의 연합이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구도는 1970년대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1970년대 이런 저항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은 현재의 과제를 찾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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