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하늘의 고난은 견뎌도 사람의 은혜는 못견딘다

등록 2013-12-17 19:44

2010년 개봉된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에서 홍콩 배우 저우룬파가 열연한 공자.
2010년 개봉된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에서 홍콩 배우 저우룬파가 열연한 공자.
[휴심정] 범부가 본 공자 이야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시 공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논어>를 읽어보면 그 대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논어>를 소설로 꾸며 공자의 시대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저, 이생은 어느 날 밤 공원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보니 2500년 전 중국 땅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중국 땅을 방랑하던 중 열국을 주유하던 공자 일행과 우연히 만나 짐꾼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보고 겪은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때는 서기전 489년, 63살의 공자가 열국을 주유한 지 8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공자 일행은 이레 동안 들판을 헤매며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자공의 활약으로 간신히 식량을 구해 아사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때 공자께서 하신 “군자는 원래 궁한 자이다”라고 한 군자고궁(君子固窮)의 고사는 지금도 유명하지요?

허기를 간신히 면한 제자들은 모처럼 여유롭게 은행나무 아래 둘러앉아 공자의 강론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도 먼발치의 짐꾼들 틈에 끼어 그날의 강론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강론이 시작되자 공자께서 온화한 눈빛으로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저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우리는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과연 나의 도(道)가 아직은 많이 부족해서인가?”

자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께서 덕(德)을 쌓고 의(義)를 품은 지 오래이신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자가 대답합니다.

“군자란 도를 닦고 덕을 세우다가 곤궁에 빠진다 해도 절의를 바꾸지 않는 법이다. 시대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시운(時運)이며,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군자는 오직 쉼 없이 자신을 닦으며 때를 기다리는 자이다.”

현실감각이 뛰어났던 제자 자공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합니다.

“세상이 선생님의 도를 감당하지 못하니, 차라리 선생님이 도를 약간 낮추시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가 웃으며 대답합니다.

“군자가 아무리 그 도를 잘 닦아 기강과 계통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도를 부지런히 닦지도 않은 채, 스스로 도를 낮추어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이래서는 그 생각이 원대해질 수 없고, 그 뜻이 넓어질 수 없는 것이다.”

차례가 마침내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연에게 돌아왔습니다. 안연이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합니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원대합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능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 이미 도를 추구하고 행하고 계신데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군자의 참모습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도가 닦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치욕이요, 도덕이 높은 인재를 쓰지 않는 것은 그 나라의 수치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군자의 참모습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입니다!”

강론이 끝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더 문답의 여운에 젖어 있었습니다. 백미는 단연 안연의 대답이었습니다. 안연의 답변이야말로 공자가 이 굴욕의 고난 속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자, 자신이 직접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이었을 겁니다. “보아라, 여기 진정한 군자가 있다. 나는 그의 집사가 되어도 좋으리라!”라고.

안연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승과 함께 노니는 경지를 보여주었다면, 자로는 보통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했습니다.

“선생님, 하늘에 도가 있다면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는 벌을 줘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군자란 곤궁에 빠진다 해도
절의를 바꾸지 않는 법이다
공자가 타협안을 수용했다면
일세의 명재상이 됐을진 몰라도
만세의 스승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에게 현실타협론은
강물에 떠가는 나뭇잎 위에서
춤추는 개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덕(德)과 복(福)은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것, 바로 그러하기에 천명(天命)이 존재한다는 걸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자로야, 천명과 시운은 사람의 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답을 바라고 인의(仁義)를 행하는 자가 아니다. 인격을 닦는 목적이 명성이나 부에 있지 않을 때, 그 도는 비로소 도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리하여 군자는 한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과 같다. 날이 추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시들지 않는 기상을 우리가 알게 되지 않더냐?”

자공의 질문이야말로 다들 하고 싶었으되 감히 꺼내지 못한 우문이었습니다. ‘도를 약간만 낮추면 안 되겠습니까?’ 참으로 절묘한 질문이 아닙니까? 명민한 현실주의자 자공은 공자의 이상이 이 비루한 세상에서는 실현될 가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공은 그래서 평소에도 이 질문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그저 모른 척하십시오. 눈높이를 낮추는 일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실감각 하나는 끝내주는 이 자공이 선생님을 중원 제일의 히트 상품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런 자공의 비즈니스 감각을 훤히 꿰뚫어보는 이가 또 누구이겠습니까? 공자는 ‘하늘을 상대로 한 장사꾼’입니다. 공자가 일찍이 자공류의 타협안을 수용했다면 일세의 명재상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만세의 스승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자에게 현실타협론은 그저 강물에 떠가는 나뭇잎 위에서 춤추는 개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날의 강론을 차례로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안연의 대답을 듣고 기쁜 나머지 “너의 집사라도 되고 싶다”던 공자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광활한 평원의 검은 반구(半球)에 은하수가 가득한데 숲 저쪽에 긴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조금 더 다가가 보니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달빛을 타고 고요히 흘렀습니다.

“회(안연)야, 왜 자지 않고 나왔느냐?”

“선생님이 겪으신 지난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분합니다.”

안연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던 공자의 모습이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박혀버린 모양이었습니다.

공자는 자신을 절대적 표상으로 여기는 이 청년의 순결함이 사랑스러우면서도 걱정이 됐습니다.

‘회는 이상이 높으나 현실을 모른다. 이 혼탁한 세상과 부대끼다 상처투성이가 되면 어쩌나….’

이윽고 어둠 속에서 공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낮고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마치 거대한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웅혼했습니다.

안연은 우는 듯했습니다. 한동안 흐느낌 같은 바람 소리만이 어두운 밤공기를 타고 들판으로 퍼져 나갈 뿐이었습니다.

나는 두 사람을 숲 속에 남겨둔 채 최대한 인기척을 감추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그때 나도 울었을까요?

그로부터 약 200년 뒤에 쓰인 <장자>(莊子)에는 이날 두 사람의 심야 대화가 묘한 형태로 남았습니다. 공자를 비웃는 빼어난 우언(寓言)으로 곧잘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했던 장주 일파가 왜 이날의 대화를 자기들의 경전에 남겼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날의 묘사만큼은 나, 이생이 목격한 장면의 진실과 무엇인가 통하는 맥이 있었습니다. 아, 그때 나 말고 또 누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요!

그때 그 ‘은자’가 전한 말에 따르면, 공자는 안연이 자신을 무척 사랑한 나머지 슬퍼할까 걱정되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회야! 하늘이 주는 고난쯤이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주는 은혜와 기쁨은 견디기 어렵구나. 회야, 잊지 마라. 세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하늘과 사람은 하나일 뿐이니, 지금 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가 누구이겠느냐?”

자로는 정의를 묻고, 자공은 지혜를 묻고, 안연은 인을 물었던 광야의 밤이었습니다.

하늘 가득 별은 찬란한데 공자는 잠 못 이루고, 유성 하나가 긴 꼬리를 끌며 하늘로 돌아간 그런 밤이었습니다.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1.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2.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3.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4.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5.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