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아레티노(1492~ 1556)는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르네상스 절정기였던 16세기 초중반 활동했던 시인, 극작가, 풍자문학가, 미술비평가로 마키아벨리와 다빈치보다는 약간 뒤에, 미켈란젤로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살았다.
<오라치아> 등 여러 편의 희곡과 6권짜리 편지모음 <서간집> 등이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아레티노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포르노그래피의 원조로 꼽히는 책 <아레티노의 16가지 체위>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언급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가 줄리오 로마노의 16가지 성교 장면 드로잉, 이를 판각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판화, 이 판화들에 대한 아레티노의 시 ‘음란한 소네트’를 합친 것이다. 또한 아레티노는 흔히 글을 앞세워 당시 교황, 황제, 귀족 등 권력층에게서 돈을 ‘뜯어낸’ 파렴치한으로 평가된다.
곽차섭 부산대 교수(사학과·오른쪽 사진)가 최근 아레티노를 다룬 전기 <아레티노 평전>(길)을 펴냈다. 곽 교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마키아벨리, 미시사 등을 연구해온 중견 사학자로 현재 서양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번 평전은 아레티노의 주요 저작과 당대의 각종 문헌 등 1차 사료를 바탕 삼아 아레티노의 삶을 재구성하고 그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엄밀하게 쓴 학술서지만, 르네상스와 서양 문화사에 관심있는 일반 독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11일 부산대 연구실에서 만난 곽 교수에게 아레티노를 연구한 이유를 물었다. 곽 교수는 지난해 미국에서 출판됐다는 아레티노 관련 책 한 권을 보여줬다. 제목은 <르네상스, 포르노 스타-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기꾼,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전설>이었다. 그는 “이렇게 아레티노는 음란하고 부도덕한 통속작가라는 비난에서 수백년 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하지만 그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성적 리얼리즘과 속어(당시 이탈리아어) 문학을 개척한 문인, 주류에 도전한 문화 아이콘이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소도시 아레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레티노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당시 식자층의 필수 언어였던 라틴어도 몰랐다. “당시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라틴어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죠. 마치 조선시대 성리학과 한문을 모르면 행세할 수 없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아레티노는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고전, 라틴어 모른다. 내가 쓴 것은 모두 내 생각이다’고 큰소리치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전들을 앵무새처럼 따라 읊는 학자와 문인들을 비웃었죠.”
‘음란한 소네트’나 <6일간의 대화> 같은 포르노에 가까운 글에 대해서도 곽 교수는 “내용이 매우 외설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밑에는 앞에서는 도덕을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창녀를 찾는 위선적인 세태에 대한 풍자가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아레티노는 더 나아가 성이 부끄러운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이고 문명의 기초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습니다.”
아레티노는 오직 글재주로 큰돈을 벌고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금속활자 인쇄술로 책을 만들어 팔았고, 권력층에게 아부와 비판이 담긴 글을 씀으로써 돈과 금품을 받았다. 예를 들어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등에게 “폐하는 카이사르인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다”, “어떻게 신앙심이 결여된 튀르크인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느냐”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낸다. 문제는 아레티노가 이 편지 사본을 <서간집>으로 묶어서 팔았다는 것이다. <서간집>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권력자들은 아레티노에게 돈이나 선물을 보내 편지의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고 싶어했다.
“아레티노는 사적인 편지를 돈을 목적으로 출간한 최초의 작가였습니다. 인쇄술은 아레티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죠. 권력자들이 일개 작가에 불과한 아레티노에게 신경을 쓴 것은 결국 대중들에게 편지 내용이 알려진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니까요. 오늘날의 인터넷과 유사합니다. 아레티노는 일종의 ‘파워 블로거’였던 셈이죠.” 인쇄술의 발명으로 가능해진 이런 힘, 즉 불특정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정 정보를 퍼뜨림으로써 생겨나는 권력을 거의 최초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아레티노를 근대 ‘저널리즘의 원조’, 근대 ‘문인공화국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고 곽 교수는 전했다.
곽 교수는 아레티노를 한마디로 ‘괴짜’라고 정의했다. “흔히들 르네상스기를 ‘천재의 시대’라고 합니다. 유난히 천재 표현을 좋아하는 일본을 따라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르네상스기는 ‘괴짜의 시대’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뛰어나다는 뜻의 천재라는 표현은 미켈란젤로, 다빈치, 마키아벨리 같은 르네상스기 인물들을 표현하기에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독창성과 개성이 뛰어난 인물들, 즉 괴짜들이었고, 당시 이탈리아는 그들의 재능을 돈 주고 사줄 수 있는 물질적 여건이 형성돼 있었습니다. 이 두 요소의 만남이 르네상스를 만들었죠. 아레티노도 전형적인 르네상스 괴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르네상스를 보통 ‘고대 그리스·로마 인본주의의 부활’로 정의하지만, 아레티노처럼 이에 저항했던 비주류 통속문화도 존재했던 좀더 복합적인 시기였다는 것이 곽 교수의 주장이다.
8년 남짓 아레티노 연구에 매달려왔다는 곽 교수는 마키아벨리 <군주론> 출간 500주년인 올해 안에 이탈리아어 원전 번역본을 펴내는 것을 또다른 목표로 삼고 있다.
부산/글·사진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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