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고용·소득 불안이 심화되자 노동자들이 개인적인 ‘재테크’를 통해 이에 대응하려는 ‘자산적 개인주의’ 현상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부자되세요’ 담론이 유행하고, 재테크 서적·정보가 급증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기억과 전망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
일자리 불안해지자 재테크 골몰
파편화한 대중, 보수적 재정치화
재벌·금융자본 ‘혼성 신자유주의’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질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97년 체제’를 형성한다. 이 체제의 특성을 ‘금융지구화’, ‘혼성적 신자유주의’라는 틀로 설명하고, 이 변화가 경제 양극화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약화로 이어졌음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나왔다. 최근 출간된 계간지 <기억과 전망> 여름호는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주제의 기획 하에 장진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기초교육학부)의 논문 ‘금융지구화와 한국 민주주의’와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의 논문 ‘김대중 모델과 한국 경제 97년 체제’를 실었다. 장진호 교수의 글은 ‘금융지구화’라는 세계사적 움직임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하고 특히 금융지구화가 일상생활과 대중들의 의식 안으로 침투하고 있는 ‘자산적 개인주의’ 현상에 주목한다. 장 교수는 ‘금융지구화’를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초국적 금융자본의 주도로, 각국의 금융시장들이 전지구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돼 가는 과정과 이렇게 변화한 현실”이라고 정의한다. 금융지구화는 한 나라 안에서는 ‘금융자유화’, 즉 ‘금융부문에 있어서 민간 시장행위자의 거래활동과 관련된 각종 정부규제의 완화 및 철폐’를 촉진한다.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기 시작해(‘얕은 단계의 금융자유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깊은 단계의 금융자유화’).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만성화되고 정리해고, 파견근로제 등이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두 현상의 결합은 ‘자산적 개인주의’로 이어진다. 장 교수는 “노동자들은 계급적 주체로서 고용, 지위 및 소득 불안정에 맞서기보다는 ‘재테크’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일종의 ‘자산적 개인주의’, 즉 ‘현명한’ 투자를 통한 개별적인 자산축적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맷돌에 대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과 같은 현상들도 자산적 개인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경제상황의 지표로서 주가지수의 중요성 부상, 1999년 벤처붐, 2007년 펀드붐, 국내 은행들의 가계대출 경쟁, 국내 주택가격 폭등, 금융상품 다양화, ‘부자되세요’ 담론의 대중화, 재테크 서적·정보의 폭증 등이다. 장 교수는 “이런 현상들은 국내에서 공공적 가치가 우선시되던 시민사회를 자산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금융화된 사회’로 급속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대중들을 탈정치화 혹은 보수적으로 재정치화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집권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금융화는 단지 경제구조와 일상생활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관련해 중요한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장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공공적 시민사회의 영역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서는 금융거래세 도입, 금융소득 과세 강화, 은행의 공공성 제고, 주주 중심 경영 축소, 주택금융시장 규제, 세입자 주거안정, 공공주택 보급, 경제관료 견제 등 금융공공성을 강화하고 대출·부채경제를 약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병천 교수의 글은 외환위기를 전환점으로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체제의 기본골격이 형성됐다고 진단하고, 이 ‘97년 체제’를 재벌과 금융자본이 공생하는 ‘혼성적 신자유주의’ 체제로 규정한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정부 초기 은행과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금융시장 전면개방을 거치면서, 은행들은 단기수익성을 추구하는 영리기관으로 변화하고 자본시장은 외국자본의 비중이 급속도로 높아졌다”며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경제는 기존의 개발주의적 국가-금융-산업 관계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 체제로 재편된다”고 말했다.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방향으로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 제고, 외국자본의 주식 보유한도 폐지,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등의 조처도 취해진다. 하지만 정부는 기존 재벌들에 대한 ‘쓴 약’이 될 수 있는 이런 조처들만 취한 것이 아니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자사주 취득 한도 폐지, 지주회사제도 도입 등 재벌들이 경영권을 방어하고 계열사간 출자를 늘릴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규제완화 조처들도 함께 제공한다. 이 교수는 “이런 구조조정 결과 글로벌 시장의 일부분이 된 자본시장이 ‘주가’를 통해 재벌과 대기업을 규율하기 시작했지만, 재벌 또한 자본시장에 적응하고 활용하면서 재벌체제를 유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이를 재벌과 외자 주도 금융자본 간의 공생 형태, 즉 한국 스타일의 혼성적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이름붙였다. 이 교수는 이 시기에 ‘노동규율’ 이 재정립됐다는 점도 강조한다.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대표되는 노동시장의 급격한 유연화와 이중화, 공권력에 의한 파업 탄압 등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 아래 자본의 노동에 대한 지배력이 새롭게 구축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김대중 모델에서 오늘날 사회경제적 양극화, 민생 불안 및 미래 불안 그리하여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화’를 가져온 한국 경제 97년 체제의 기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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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금융자본 ‘혼성 신자유주의’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질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97년 체제’를 형성한다. 이 체제의 특성을 ‘금융지구화’, ‘혼성적 신자유주의’라는 틀로 설명하고, 이 변화가 경제 양극화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약화로 이어졌음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나왔다. 최근 출간된 계간지 <기억과 전망> 여름호는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주제의 기획 하에 장진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기초교육학부)의 논문 ‘금융지구화와 한국 민주주의’와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의 논문 ‘김대중 모델과 한국 경제 97년 체제’를 실었다. 장진호 교수의 글은 ‘금융지구화’라는 세계사적 움직임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하고 특히 금융지구화가 일상생활과 대중들의 의식 안으로 침투하고 있는 ‘자산적 개인주의’ 현상에 주목한다. 장 교수는 ‘금융지구화’를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초국적 금융자본의 주도로, 각국의 금융시장들이 전지구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돼 가는 과정과 이렇게 변화한 현실”이라고 정의한다. 금융지구화는 한 나라 안에서는 ‘금융자유화’, 즉 ‘금융부문에 있어서 민간 시장행위자의 거래활동과 관련된 각종 정부규제의 완화 및 철폐’를 촉진한다.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기 시작해(‘얕은 단계의 금융자유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깊은 단계의 금융자유화’).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만성화되고 정리해고, 파견근로제 등이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두 현상의 결합은 ‘자산적 개인주의’로 이어진다. 장 교수는 “노동자들은 계급적 주체로서 고용, 지위 및 소득 불안정에 맞서기보다는 ‘재테크’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일종의 ‘자산적 개인주의’, 즉 ‘현명한’ 투자를 통한 개별적인 자산축적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맷돌에 대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과 같은 현상들도 자산적 개인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경제상황의 지표로서 주가지수의 중요성 부상, 1999년 벤처붐, 2007년 펀드붐, 국내 은행들의 가계대출 경쟁, 국내 주택가격 폭등, 금융상품 다양화, ‘부자되세요’ 담론의 대중화, 재테크 서적·정보의 폭증 등이다. 장 교수는 “이런 현상들은 국내에서 공공적 가치가 우선시되던 시민사회를 자산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금융화된 사회’로 급속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대중들을 탈정치화 혹은 보수적으로 재정치화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집권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금융화는 단지 경제구조와 일상생활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관련해 중요한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장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공공적 시민사회의 영역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서는 금융거래세 도입, 금융소득 과세 강화, 은행의 공공성 제고, 주주 중심 경영 축소, 주택금융시장 규제, 세입자 주거안정, 공공주택 보급, 경제관료 견제 등 금융공공성을 강화하고 대출·부채경제를 약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병천 교수의 글은 외환위기를 전환점으로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체제의 기본골격이 형성됐다고 진단하고, 이 ‘97년 체제’를 재벌과 금융자본이 공생하는 ‘혼성적 신자유주의’ 체제로 규정한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정부 초기 은행과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금융시장 전면개방을 거치면서, 은행들은 단기수익성을 추구하는 영리기관으로 변화하고 자본시장은 외국자본의 비중이 급속도로 높아졌다”며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경제는 기존의 개발주의적 국가-금융-산업 관계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 체제로 재편된다”고 말했다.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방향으로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 제고, 외국자본의 주식 보유한도 폐지,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등의 조처도 취해진다. 하지만 정부는 기존 재벌들에 대한 ‘쓴 약’이 될 수 있는 이런 조처들만 취한 것이 아니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자사주 취득 한도 폐지, 지주회사제도 도입 등 재벌들이 경영권을 방어하고 계열사간 출자를 늘릴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규제완화 조처들도 함께 제공한다. 이 교수는 “이런 구조조정 결과 글로벌 시장의 일부분이 된 자본시장이 ‘주가’를 통해 재벌과 대기업을 규율하기 시작했지만, 재벌 또한 자본시장에 적응하고 활용하면서 재벌체제를 유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이를 재벌과 외자 주도 금융자본 간의 공생 형태, 즉 한국 스타일의 혼성적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이름붙였다. 이 교수는 이 시기에 ‘노동규율’ 이 재정립됐다는 점도 강조한다.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대표되는 노동시장의 급격한 유연화와 이중화, 공권력에 의한 파업 탄압 등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 아래 자본의 노동에 대한 지배력이 새롭게 구축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김대중 모델에서 오늘날 사회경제적 양극화, 민생 불안 및 미래 불안 그리하여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화’를 가져온 한국 경제 97년 체제의 기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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