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다양한 이념·계층 대변하는 정당
정책 경쟁하면서 민주주의 발전
지금의 정당들은 ‘자해적 개혁’뿐
정책 경쟁하면서 민주주의 발전
지금의 정당들은 ‘자해적 개혁’뿐
4·24 재보선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한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지난달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어 화제가 된 책이 있다. 최장집(사진) 고려대 명예교수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다. 안 의원이 이 책을 읽는 모습은 다소 역설적인데,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로 요약되는 최 교수의 평소 지론으로 보면, 안 의원은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상징이자,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 위기를 더 부채질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내 진보 정치학계의 원로이자 ‘민주주의’ 연구 대표 학자인 최 교수와 그와 견해를 같이하는 연구자들의 공동 저작 두 권이 동시에 출간됐다.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최장집·박찬표·박상훈·서복경·박수형 지음
후마니타스·1만8000원 어떤 민주주의인가
최장집·박찬표·박상훈 지음/후마니타스·2만원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최 교수, 박찬표 목포대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박수형 고려대 학문소통연구회 연구교수 등 5명이 최근 몇년간 발표했던 논문 10편을 수정·보완해 묶은 것이다. 또 한 권은 2007년 출간됐던 <어떤 민주주의인가>의 개정판인데 최 교수, 박 교수, 박 대표가 함께 쓴 책이다. 초판의 ‘총론’을 빼고, 노동, 경제모델, 남북문제를 다룬 세 장을 추가했다.
두 권의 책은 세부 주제가 조금 다를 뿐 유사한 문제의식과 주장, 이론을 담고 있다. 굳이 구별하자면 <어떤 민주주의인가>는 참여정부 때,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이명박 정부 때 주로 쓴 글을 묶었다. 두 책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이 글들은 대부분 매우 논쟁적인데, 비판의 칼끝은 소위 미국식 정당개혁론, 시민정치론, 운동정치론, 직접민주주의론 등 여러 방향을 향해 있다.
최 교수 등의 견해는 흔히 ‘정당 정부론’, ‘정당 민주주의론’, ‘책임정당 모델’, ‘대중 정당론’ 등으로 불린다. 이들은 “좋은 정당, 좋은 정당체제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 구조를 반영할 수 있도록, 이념적·계층적·대중적으로 넓게 포진한 복수의 정당을 가져야 한다. 이 정당들이 자신이 대표하는 계층·이념을 위한 정책을 가지고 선거에 나서고, 선거 승리로 집권한 뒤에는 그 정책을 구현하려 노력하고, 다음 선거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당연한 말 아니냐고? 그러면 왜 ‘김대중 정부’, ‘박근혜 정부’라고 말하는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면 ‘민주당 정부’, ‘새누리당 정부’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워져야 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들이 보기에 새누리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대 정당은 현상유지를 바라는 유권자만을 대표하고 있다.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를 대변할 정당이 없다는 점, 즉 ‘대표되지 않는 유권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 우리 정치의 핵심 문제다. 노동자,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청년 세대 등이 ‘소외된 유권자’의 대표적 구성원들이다. 특히 국민의 절대다수가 노동자(임금생활자)인 상황에서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이 없다는 점은 민주주의 발전의 큰 걸림돌이다. 진보 정당들의 분열과 약화로 이런 ‘노동 없는 민주주의’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최 교수 등은 10여년 동안 이런 입장을 줄기차게 펼쳐왔지만, 현실 정치는 이들의 지향과 정반대로 흘러왔다. 그동안 ‘정치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행해진 각종 제도와 조처들, 즉 지구당 폐지, 중앙당 약화, 원내 정당화, 국회의원의 당으로부터의 자율성 강화, 국민경선제, 여론조사 중시, 모바일투표 등은 이들이 보기에 일종의 “자해적 정당 개혁”(최장집)이었다.
그 결과 정치 혐오증은 더 심해지고 투표율은 낮아졌다. ‘노무현 현상’ ‘안철수 현상’처럼 ‘무슨 무슨 현상’이 반복되고,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전형적 양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특정 국면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처럼 변화의 에너지가 분출하지만, 그 국면이 지나고 나면 기존 구조나 체제는 바뀐 것 없이 건재하게 유지·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현상”(박상훈) 을 말한다.
이들은 이런 결과를 낳은 기존의 ‘정치개혁’론, 곧 정치가 달라져야 하고 새 인물로 교체가 이루어져야 하며 정당은 외부에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담론에 대해, 그 담론을 이끈 언론, 학계, 시민운동 진영의 “정치시장에 진입하고자 하는 욕구를 정당화해주는 일종의 ‘엘리트 순환론’”(박상훈)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대신 정당 안에서 훈련되고 경력을 쌓은 직업정치가 인재 풀이 풍부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정당이 포함된 다당제가 자리잡고, 결선투표제가 도입돼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은 긴밀하게 협조해 관료체제를 통제하며 선거 때 공약한 정책을 실현해나가야 한다.
거칠게 분류하면 기존 ‘정치개혁’론이 ‘미국식 전문가정당 정치모델’이라면, 이들이 지향하는 체제는 진보정당이 주축이 된 ‘유럽식 대중정당 정치모델’이라 할 수 있다.
정치모델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더라도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권력을 갖지 않고 그에 가까이 있지 않은 사람들, 사회적 약자, 가난한 사람의 선호는 얼마나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대우받고 있는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는 최 교수의 지적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사진 후마니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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