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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계화에 결딴난 민중…박현채, 그를 다시 부른다

등록 2005-07-14 16:38수정 2005-07-14 22:48

박현채는 지리산을 즐겨 올랐다. 그를 모델삼아 ‘소년 빨치산’을 <태백산맥>에서 묘사했던 작가 조정래는 지리산 등반의 단짝이었다. ‘옛 현장’을 찾아 지리산을 뒤지다시피 하며 자주 올랐지만, 정상에 오르지 않고 7부 능선까지만 오른 뒤 내려오는 게 박현채의 ‘산행 습관’이었다. 사진은 198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의 어느 능선에 오른 모습.   박현채 추모전집·문집 간행위원회 제공
박현채는 지리산을 즐겨 올랐다. 그를 모델삼아 ‘소년 빨치산’을 <태백산맥>에서 묘사했던 작가 조정래는 지리산 등반의 단짝이었다. ‘옛 현장’을 찾아 지리산을 뒤지다시피 하며 자주 올랐지만, 정상에 오르지 않고 7부 능선까지만 오른 뒤 내려오는 게 박현채의 ‘산행 습관’이었다. 사진은 198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의 어느 능선에 오른 모습.   박현채 추모전집·문집 간행위원회 제공
소년 빨치산, 수차례 복역, 재야학자…무엇보다 ‘민족경제론’이란 화두를 던지며
민족주의와 민중적 관심을 묶어낸 박현채… 내달 17일이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포위당한 현실은 그가 꿈꾼 세상과 반대쪽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부활이 절실하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 박현채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박승옥 ‘박현채 추모전집·문집 간행위원회’ 간사) “진보적 사회과학자라면 여전한 그의 영향, 정신의 뿌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박순성 동국대 교수)

교수니 학자니 해도 그저 선생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역사와 현실을 고민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스승일 수 있었던 사람. 앞으로 한 달 뒤, 그러니까 8월17일이 ‘민족경제론’이라는 화두를 세상에 던졌던 박현채가 1995년 6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유화’가 도미노처럼 일어났던 90년대 초반부터 박현채는 사실상 외부를 향한 말과 글을 닫았다. 밤마다 워드프로세서 앞에 앉아 흐느끼곤 했다고 부인은 전한다.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전환에 대한 고뇌는 미처 글이 되지 못하고 암세포로 남았다.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고, 10년이 지나도록 그의 평전 하나, 문집 하나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후학들은 아직 그가 홀로 삼킨 고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광복 60주년인 올 8월이면 정부와 민간 차원의 각종 행사가 줄줄이 열린다. 그 덕에 박현채의 10주기는 그냥 묻혀 지나갈 게 분명해 보인다. 10주기에 맞춰 열리는 추모행사는 아직 뚜렷하게 예정된 게 없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한국 사회 전체에 크게 기여한 박 선생이지만 딱히 소속한 단체나 조직이 분명치 않아 이런 상황이 빚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산업사회연구회 및 서울대 사회학과를 기반으로 했던 김진균 교수의 후학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것과도 대비된다.

박현채의 삶 자체가 특정 학문집단에 둥지를 트는 것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다. 1934년 11월3일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그는 16살의 나이에 빨치산으로 입산했다. 총상을 입고 하산한 뒤 공무원인 아버지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이후 전주고를 거쳐 5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64년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사건(이른바 1차 인혁당사건)에 연루돼 1년간 복역했다. 그에게는 그럴듯한 학위 하나 없다. 79년과 80년에도 두차례 복역과 구금을 당하는 등 생의 대부분을 ‘재야 학자’로 보냈다. 88년 이돈명 변호사가 조선대 총장이 된 뒤에야 이 대학 경제학과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가 병으로 쓰러진 것이 93년이다. 강단에 서 있었던 시간은 5년도 되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영향력

 “제 민족과 가난한 자에 대한 충만한 사랑으로 …새로움을 현실에서 창조하려는 노력”(박현채 <경제학과 나>)으로 살았던 그는 “경제성장이나 발전은 민중의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연구하고 실천했다.

 “제 민족과 가난한 자에 대한 충만한 사랑에 복종하는 도덕성. 이론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지적 도덕성. 이런 도덕성을 삶 전체에 일관되게 견지하는 더 큰 도덕성. 이것이 박현채 삶의 본질이며 영향력의 실체”라고 김균 고려대 교수는 말했다. ‘민족경제론’은 그가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해방 이전부터 60∼7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던 민족주의적·민중적 관점을 총괄한 경제이론”(류동민 충남대 교수), “남북한 경제학계에서 유일하게 통일 지향의 민족 경제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가치있는 이론”(박영호 한신대 교수) 등이 그것이다.

박현채는 “경제이론에서의 인간 복권, 특히 광범위한 직접 생산자의 참여가 보장되는 경제발전, 민주주의적 집회와 절차에 의해 작성되고 집행되는 경제계획에 의한 국민경제의 운용”을 주창했다. 시장과 계획의 조화, 시장영역과 공공영역의 공존, 그리고 민주적 통제라는 원칙이 관철되는 기본 단위가 바로 ‘민족경제’다.

그의 사상은 박정희 정권의 초기 경제개발 계획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야시절 설파한 ‘대중경제론’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재야에서 강단을 능가했다. 적어도 60년대까지 그는 한국 경제학의 ‘주류’였고, 70년대에는 개발독재 비판을 뒷받침하는 유일무이한 ‘대안’이었으며,. 80년대에는 모든 논쟁의 ‘이론적 근원’이었다는 평가들이 있다.

그 절정은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에 불을 당긴 ‘현대 한국사회 성격과 발전단계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이었다. 85년 <창작과비평>에 실린 이 글은 당시 화두였던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동시에 논파하며 한국 사회구성체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주창했다. 그 시절 그는 “논쟁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결코 어느 한 진영에 속하지 않고 논쟁을 격화시키는 기묘한 역할”을 하면서, 모든 사회과학자에게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적 화두, 공통의 언어이자, 논쟁을 격화시키는 모호한 전선, 점령돼야 할 성지”로 받아들여졌다.(김균·박순성)

‘민족경제론’ 재구성 움직임

한국 경제학의 흐름에서 박현채와 같이 독보적인 방법론을 구축한 경우는 드물다. 물경 30년 동안 그는 한국 사회과학의 토양이자 한 봉우리였다.

분단, 경제성장, 민주주의 문제를 하나의 이론틀에서 통합했던 그의 이론과 실천은 그러나 시장주의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오늘에 대해 대체로 무기력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바람으로 일국적 수준의 거시경제 전략이 크게 퇴색한 오늘의 현실에서 (민족경제론은) 그다지 많은 함의를 주지 못한다”(박영호 한신대 교수)는 지적은 타당하다.

역설적이게도 민족경제론의 현실적합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그 ‘현실’은 동시에 박현채를 오늘에 다시 불러내는 힘이다. 조석곤 상지대 교수는 “최근 시장적 접근과 민중적 접근 사이의 대립은 성장주의와 민족경제 수립이라는 주장이 대립하던 60년대 상황과 닮은 꼴”이라고 말한다. 시장 대 국가, 세계화 대 반세계화, 신고전파 주류경제학 대 비판적 비주류경제학의 대립 구도에서 압도적 열세에 처한 후자의 흐름을 되살릴 유일한 ‘자양분’이 바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느 이론, 어느 실천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민중’의 처지가 그를 다시 부르고 있다.

그가 탄생을 주도한 한국사회과학연구소가 <동향과 전망> 최근호를 통해 ‘신진보주의 발전모델’을 주창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등은 공동 발제문 형식으로 ‘신진보주의 발전모델’의 주요 테제를 밝혔다. 그 핵심은 남북한을 잇는 한반도 경제를 기본단위로 삼아 동아시아 지역경제 통합을 지향하는 ‘개방형 민족경제’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때 개방형 민족경제는 일국 단위의 폐쇄적 자립경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개방에 열려 있되 혁신·연대·복지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한반도 경제의 패러다임을 재설계”하기 위해, 민족경제론의 21세기적 재구성이라는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박현채의 이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국가사회주의로 경도된 후기가 아닌 ‘전기 박현채’를 비판적으로 계승할 것을 주창해온 이병천 교수는 “박 선생의 경제담론을 인문담론과 연결시키는 게 관건”이라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민족경제론의 바탕에 깔린 ‘민중적 민족주의’에 주목하는데, “‘민중적 민족주의’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인문담론 차원에서 해명하는 것이 후학들의 과제”라고 말했다. 이 고민은 자유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잇닿아 있다.

세상 무관심속 추모식도 버거워

사실 박현채의 영향력은 지난 10여년 동안에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민주화 정부가 두 차례 들어서는 동안 그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혹은 받았다고 평가되는) 경제학자들이 경제 분야의 장관급 관료와 청와대 참모로 줄줄이 자리를 잡았다. 다만 어쩐 일인지 한국 경제는 자꾸만 박현채가 꿈꾸었던 전망과 반대 방향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와 함께 공부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사람들이 시장주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거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지휘하는 경제관료가 된 사실에 이르러, 그의 ‘올바른 부활’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이제 박현채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하는 이유 하나를 더 첨가해야겠다. 그의 이론지평이 신자유주의 물결에 대책없이 묻히는 것을 안타까와하는 사람들이 ‘박현채 추모전집·문집 간행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무관심 속에 10주기 추모식조차 힘겹다.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전집과 문집을 내는 일은 탄생일인 11월3일 전후로 미뤄졌다.

진지함이 오히려 조롱받는 시대, 모두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로 달려가는 시대, 그 뒤에서 신자유주의가 유일한 권위로 군림하는 이 시대에 한국 사회가 읽어야 할 진정한 ‘고전’의 한갈래에 마르크스도 케인즈도 아닌 박현채가 자리잡긴 어려운 일일까. 그를 잊고 있었던 지난 10년 동안 어쩌면 우리 모두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8월을 거쳐 11월이 올 때까지 ‘박현채 다시 읽기’ 운동이라도 펼치는 건 어떤가. 추모사업회 연락처는 (02)362-5279, gileseo@ournature.org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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