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작가 다고 기치로
일제시대 악보서 덕혜옹주 동시 발굴한 다고 기치로
‘윤동주 시인’ 다큐만든 피디출신
한국문화 전문 저술가로 변신해
“후속연구로 ‘덕혜의 한’ 풀리길”
‘윤동주 시인’ 다큐만든 피디출신
한국문화 전문 저술가로 변신해
“후속연구로 ‘덕혜의 한’ 풀리길”
윤동주 시인의 삶을 첫 한-일 합작 다큐로 만들었던 인연으로 잘나가는 공영방송 피디에서 한국문화 전문 저술가로 변신한 일본인 작가 다고 기치로(왼쪽)는 요즘 ‘조선의 마지막 황녀-덕혜옹주의 동시’에게 빠져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단지 마지막 황녀가 직접 지은 시여서가 아닙니다. 이 시들은 한국의 민족적 보물이라 할 만합니다. 너무도 어려웠던 식민지 상황에서 고통과 신음하는 민족의 마음을 멋진 시어로 표현한 영혼의 기록입니다”라고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난해 도쿄의 한 도서관에서 일제 때 악보집인 <미야기 미치오 작품전서>(1979년 간행)에 실린 덕혜의 시에 곡을 붙인 동요 악보 2편, ‘벌’과 ‘비’를 발견했다. 근대 일본 음악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미야기가 1923년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의 의뢰에 따라 만든 곡이었다.
“악보의 해설집에 ‘옹주는 경성의 히노데 소학교 5학년에 재학중으로, 일본어로 이 곡과 같은 귀여운 시를 많이 만들어 조선의 스미노미야 전하라 불릴 만한 분이었다’는 설명이 있어요. 히로히토 왕의 동생으로 당시 ‘동요의 왕자님’으로 불린 스미노미야와 견줄 재능이었다는 얘기가 놀라웠어요.”
추가 조사에 나선 그는 작곡가 구로사와 다카토모의 그림 시집 <귀여운 동요>(1924~27년 편)에서도 악보 2편을 찾아냈다. 구로사와는 전 10권 가운데 제9집에 ‘이덕혜 공주마마 작’의 시에 곡을 붙인 동요 ‘비’ ‘삐라’(전단)와 동시 ‘쥐’를 소개해놓았다.
그는 최근 발간된 <문학사상> 8월호에 ‘알려지지 않은 천재 동시작가 덕혜옹주’라는 제목으로 이 과정을 발표했다. 성공회의 유시경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 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느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비)
“이 시들은 옹주가 일본으로 ‘유배’를 떠나기 2년 전인 23년 전후 조국을 빼앗은 이민족의 언어로 썼지만, 부친(고종)의 죽음과 3·1 독립운동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정치적 긴장 상황 속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한 시어들에서 말할 수 없는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옹주의 시에 줄곧 나타난 ‘하느님’은 망국의 비애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천상의 저편에서 나라의 혼을 지키고자 하는 존재로 읽힌다”고 풀이했다. 그는 80년대 중반 도쿄의 일본문화학원 복식박물관에서 전시해놓은 덕혜와 그의 딸 정혜의 한복을 보고 처음으로 옹주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 한복들은 정략결혼한 일본인 남편 소 다케유키 백작이 옹주와 이혼한 뒤 조선 왕실의 혼례품을 비롯해 생활용품을 오빠인 영친왕 부부에게 돌려보낸 것이었다. “일제가 옹주의 시로 지은 동요를 순회공연으로 소개하기도 했고, 기차여행 중에 한국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도 들었다는 악보집의 기록들에 비춰볼 때 옹주는 4편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긴 듯하다”고 말한 그는 더 많은 후속 조사와 연구가 이뤄져 ‘침묵으로 생을 마감한 덕혜의 한’이 풀리길 기대했다. 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1925년 3월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기 직전 경성 히노데소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13살 무렵의 덕혜 옹주.
“이 시들은 옹주가 일본으로 ‘유배’를 떠나기 2년 전인 23년 전후 조국을 빼앗은 이민족의 언어로 썼지만, 부친(고종)의 죽음과 3·1 독립운동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정치적 긴장 상황 속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한 시어들에서 말할 수 없는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옹주의 시에 줄곧 나타난 ‘하느님’은 망국의 비애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천상의 저편에서 나라의 혼을 지키고자 하는 존재로 읽힌다”고 풀이했다. 그는 80년대 중반 도쿄의 일본문화학원 복식박물관에서 전시해놓은 덕혜와 그의 딸 정혜의 한복을 보고 처음으로 옹주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 한복들은 정략결혼한 일본인 남편 소 다케유키 백작이 옹주와 이혼한 뒤 조선 왕실의 혼례품을 비롯해 생활용품을 오빠인 영친왕 부부에게 돌려보낸 것이었다. “일제가 옹주의 시로 지은 동요를 순회공연으로 소개하기도 했고, 기차여행 중에 한국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도 들었다는 악보집의 기록들에 비춰볼 때 옹주는 4편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긴 듯하다”고 말한 그는 더 많은 후속 조사와 연구가 이뤄져 ‘침묵으로 생을 마감한 덕혜의 한’이 풀리길 기대했다. 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