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폭탄주에 정을 섞어 남 · 북 · 중 위해 건배

등록 2005-07-07 16:33수정 2005-07-13 02:12

  리빈 대사(오른쪽)가 서울 구기동 자신의 단골 보신탕 집에서 베이징 주재 특파원을 지낸 한국 기자들과 저녁을 먹으며 폭탄주를 마시고 있다.
리빈 대사(오른쪽)가 서울 구기동 자신의 단골 보신탕 집에서 베이징 주재 특파원을 지낸 한국 기자들과 저녁을 먹으며 폭탄주를 마시고 있다.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으로 맥주잔의 밑부분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그리고 리듬감있게 흔든다.

약간의 거품만 남아있는 맥주잔에서 청량감있는 소리가 난다. “따알랑 따알랑” 독한 양주를 담았던 맥주잔 안의 조그만 양주잔이 맥주컵과 부딪치며 나는 소리. 맥주잔 안에 술이 남아 있거나 맥주잔의 중간을 쥐면 둔탁한 소리가 난다.

그의 표정엔 환한 미소가 돈다. 입가에 묻은 약간의 맥주 거품을 닦아 내곤 다른 사람들이 마실 폭탄주를 제조한다.

그의 폭탄주는 맛이 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양주와 맥주의 적절한 배합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의 단골인 한 식당에서는 별도의 주문이 없어도 식사 시작 10분 뒤 폭탄주 제조를 위한 도구(맥주잔, 양주잔) 세트가 자동적으로 차려진다. 자신이 만든 폭탄주를 넘기며 그는 한국인들도 알아듣기 어려운 폭탄주의 원칙을 제시한다. “폭탄주는 노털카, 찡떼오, 흘려버려씹의 원칙을 어기면 안됩니다. 위반하면 즉시 한잔 벌주입니다.”

“뭐요? 그게 무슨 말이죠?(중국말인가?)”

폭탄주를 받은 한국인는 당황한다. 그는 웃으면서 설명한다. 폭탄주를 받으면 놓아서도 안되고, 털어서도 안되고, ‘카’소리를 내서도 안되며, 찡그려서도 안되고, 떼어서도 안되고, 오래 마셔도 안된다는 것이다. 또 흘려서도 안되고, 버려서도 안되고, 컵을 씹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가 폭탄주를 몇 잔이나 마실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본인은 ‘비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열 잔 정도는 별 부담없이 마시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이는 20잔 마시는 것을 봤는데 끄덕없었다고 한다.


그와 10년 가까이 친분을 가진 기자는 한 번도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무슨 비결이 있을까? 대답이 재미있다.

본국 손님에게 한국 홍보 부탁

“술 약속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물을 많이 마십니다. 1000cc짜리 생수를 책상 위에 놓고 시간나는대로 마시지요. 그럼 물이 온 몸에 있는 체세포에 충분히 흡수됩니다. 그러면 술을 마셔도 몸에 흡수가 않되고 배출되는 것 같아요.”

실제 술이 센 주인공의 이야기니 믿어 보자.

“본국(중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식사자리에서 한국의 폭탄주를 소개합니다. 주로 작은 잔에 배갈을 먹는 중국인들은 폭탄주를 보면 신기해 합니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만든 폭탄주는 잘 만들면 맛도 좋습니다. 모두 깊은 인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이 귀국할 때 폭탄주의 ‘핵’으로 쓰는 양주잔을 기념으로 서너개씩 선물합니다. ‘뇌관’을 가져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탁합니다. 한국이 생각나면 친구와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그럴 때마다 한국을 홍보해 달라구요.”

그는 주한 중국대사다. 그의 명함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다.

리빈(49) 대사는 주한 외교사절 가운데 매우 주목받는 인물이다. 한반도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국의 대사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남북한을 잘아는 외교관이라는 점이 무게를 더해준다.

그가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지 무려 33년. 베이징이 고향인 그는 지난 1972년 1월 평양에 가서 김일성대학의 조선어학과에 입학하면서 한반도와 질기고도 긴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한반도통’ 리빈 중국대사
대학 때부터 한반도와 33년 인연
백두에서 한라까지 남북 명산 두루 밟고
남북-중국 현대사 현장엔 늘 그가 있었다
다음달 돌아가는 그의 따뜻한 조언
“분단 장벽 허물려면 민간교류 많이 하세요”

졸업 직후 그는 평양의 중국대사관에 외교관으로 첫 발을 디뎠다. 그로부터 세차례 평양 근무에 14년, 두차례 서울 근무에 7년, 평양 유학 4년까지 합하면 25년간 한반도에서 살았다. 본국의 외교부에 근무할 때도 남북한 관련 업무를 보았다.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잔뼈가 굵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한국말은 외국어처럼 들리지 않는다. 평양에서 배우기 시작했으나 전혀 그쪽 사투리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숱한 일을 겪었다. 아직은 이야기하지 못할 일들이 대부분이다. 남·북한과 중국의 아슬아슬한 현대사의 한 가운데 그는 항상 자리했다. 젊어선 통역으로, 그리고 나이 들어선 외교 협상의 주연과 조연으로 남북한을 넘나들었다.

1980년대 초반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 전 북한 국가주석과 덩샤오핑 지도자의 회담을 통역했다. 1983년 상하이를 처음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역을 맡았고, 90년대 초반 한국과 수교작업은 그를 가장 긴장시켰다.

한 · 중 수교 직전 김일성 주석 만나

92년 7월 그는 당시 첸지천 외교부장과 함께 평양에 가 김일성 주석의 한 별장에서 장쩌민 총서기의 남한과의 수교 의사를 전달했다.

“최근 국제정세와 한반도 정세변화로 볼 때 중국과 한국이 수교 협상을 진행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이해와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

김 주석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듯 하더니 “우리는 중국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평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이해한다”며 덩샤오핑과 당 중앙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주석의 안목과 ‘통 큰 정치’를 느낀 순간이었다고 리 대사는 회고한다.

그리고 한달 뒤 중국과 한국은 수교했고, 리 대사는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 장쩌민 총서기의 회담을 통역했다. 2000년 3월 평양에서는 중국 대사관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밤 늦게까지 장시간 술을 마시며 당시 소원했던 북한과 중국 관계의 개선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폭탄주는 자신이 술을 좋아해 마시는 것이 결코 아니란다. 한국인들과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 마신단다. 보신탕도 평양 근무 시절부터 즐긴다. 서울에 있는 그의 단골집 주인은 “목살을 특히 잘 드신다”며 특급 단골손님이라고 말한다.

서울 외교가의 정통 한반도통으로 꼽히는 리 대사는 다음달 서울을 떠날 예정이다. 4년간의 한국 대사 역할을 마치고 본부에서 북한 핵 전담대사를 맡게 된다.

리 대사는 한반도의 산과 바다를 좋아한다고 한다. 국토가 넓은 중국의 평원에 사는 수억명 중국인의 소원은 죽기 전 산과 바다를 보는 것. 실제 너른 벌판만 바라보다가 죽는 중국인들이 많다.

임기중 마지막 과제 지리산 등반

이름 빈은 ‘물가 빈(濱)’이다. 이름 탓인지 바다를 좋아한다고 한다. 심신이 피곤하고, 깊은 생각을 해야 할 때 바다에 가곤 했다고 한다. 지난 80년대 말 북한에 근무할 때였다. 북한 동업자(외교관)들과 원산 앞바다로 놀러 갔다. 다이빙대에 올라간 그 동업자는 바다에 뛰어든 뒤 다리에 쥐가 나 허우적거렸다. 주변에 있던 그가 동업자를 살려냈다.

“제 수영 수준이 괜찮은 편입니다.”

그가 살린 그 북한 동업자는 현재 북한의 고급 관료로 그가 북한에 갈 때마다 ‘생명의 은인’으로 대한다고 한다.

산도 좋아한다. 리 대사의 고향인 베이징은 엔산 산맥이 북쪽에 있다. 만리장성이 있는 곳이다. 리 대사는 어릴 때부터 엔산산맥의 끝자락인 향산을 오르내렸다. 지난 1986년 결혼할 때 신혼여행으로 황산을 갔다. 당시 중국은 신혼여행이 그리 흔치 않았던 시절.

한반도에 근무하면서도 틈나는대로 산을 다녔다. 북한의 4대 명산을 모두 섭렵했다. “백두산은 장엄하고, 금강산은 웅장합니다. 묘향산은 화려하고, 칠보산은 아름답습니다.”

“구월산도 아주 멋있는 산입니다. 세번 가보았는데 산세가 멋이 있어 자극을 주기 충분합니다.” 임꺽정의 무대였던 구월산을 오르내렸다니 부럽다.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어요. 운이 좋아 모두 가 보았지요. 황해북도의 정방산도 온천과 역사 고적으로 유명합니다.”

남쪽에 근무하면서도 산은 항상 그의 벗이었다.

“2002년 서울 월드컵을 앞두고 한라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어요. 설악산은 여러번 갔구요. 북한산은 자주 가는 편입니다.”

아쉬운 것은 지리산을 못 가 본 것. “임기 중 남아 있는 과제 가운데 한 가지가 지리산을 가보는 것입니다.”

그는 골프도 즐긴다. 한국의 정치, 경제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위해 골프를 안 칠 수 없었다. 본인뿐 아니라 직원들도 가능한 골프를 배우고 기회가 있으면 치도록 한다. 적극적이다. 공산주의자가 자본주의 스포츠의 핵심인 골프를 마다하지 않는다. 근무하는 현지 사정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구력 3년만에 보기 플레이어가 됐다.

분단된 남북한에 대해 그는 따뜻한 조언을 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에게 우호적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분단으로 일부 오해의 장벽이 존재합니다. 많은 민간 교류가 진행돼야 합니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niha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